[권혁수 시인의 문화 산책] 두 개의 세계 한 개의 이유

M스토리 입력 2025.04.01 15:32 조회수 757 0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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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의 일이다. 아내가 창문에 커튼을 쳤다. 입춘이 지나고 대보름도 지났는데 여전히 바깥날씨가 영하 13도란다. 바람이 거세게 불어서 체감온도는 20도를 넘을 것이다.

하여 평소에는 커튼을 치지 않아 건너편 아파트 불빛을 바라보며 잠을 잤는데 오늘은 두꺼운 회색커튼을 바라보며 잠을 자야했다. 늦은 밤에 커튼을 바라보자니 아파트 불빛 대신 그리운 사람들의 모습이 커튼에 어른거린다.

어머니와 누님들 그리고 김, 이, 박…

때마침 아내의 휴대폰 벨이 울렸다. 아내는 자리에 누운 채 손을 뻗어 벨소리를 끊어버린다. 또 벨이 울린다. 그래도 아내는 받지 않고 끊었다.

내가 왜 받지 않느냐? 고 묻자 장모님 전화인데 또 잘못 걸었다고 하실 거라는 대답이다. 10년 전에 장인어른이 작고를 하여 혼자 지내시는 장모님은 시도 때도 없이 출가한 딸들 전화번호를 무작위로 누르시곤 하셨다. 누군가 전화를 받으면 잘못 눌렀다고 말씀을 하시지만 아무래도 긴 겨울밤이 적적하여 누군가의 목소리가 듣고 싶으셨던 게 아닌가 싶다.

“내일 낮에 다녀올 거예요.”

하는 아내의 말소리를 들으며 나는 다시 커튼을 바라보았다. 어두컴컴한 커튼 위에 고향 C시의 풍경이 그려진다. 이곳저곳이 시골영화관 낡은 필름처럼 비춰진다.

고향의 하늘은 어느 곳보다 더 맑고 더 푸른 것 같다. 산은 더 높고 숲은 더 우거지고 호수는 더 깊고 평온한 듯하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도 그렇게 맑고 푸르고 깊고 평온할까?

커튼에 누나의 모습이 그려진다. 고향을 지키고 있는 셋째 누나다.

누나는 여든이 될 때까지 요양병원에서 야간당직 간호사로 일을 하다 최근에 그만두셨다. 요양병원에 근무하기 전에는 10년 동안 매형의 병간을 했었다. M방송국에 근무했던 매형은 당뇨 합병증으로 고생을 하였는데 누나는 장기간의 병간에 대해 단 한 마디도 부정적인 말을 하지 않았다. 조카들도 그랬다. 특히 둘째조카는 회사에 사표를 내고 아버지의 병실을 지켰다. 3년 병에 효자 없다지만 장례를 치른 뒤에도 불평 한 마디 하지 않았다. 게다가 매형이 살아계실 때와 변함없이 가구나 집기를 그 자리에 그대로 놔두고 지낸다. 누나나 조카들 모두 그렇게 매형과 함께하듯 아끼고 기리는 모습이다.

누나는 서른이 넘어 결혼을 했다. 당시에는 여자가 서른이 넘으면 노처녀란 딱지를 붙여주던 시절이었다. 하여 하루는 걱정스럽다는 투로 내가 누나에게 물었다. “시간이 자꾸 흘러가는데 걱정되지 않으슈?” 그러자 누나는 “무슨 걱정이냐. 그날이 하루하루 가까워지면 가까워졌지 멀어지겠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닌 게 아니라 오래지않아 H병원 원장님 중매로 매형을 만나 결혼을 하였고 이내 아들 둘을 쑥쑥 낳았다. 누나 나이 서른네 살 때의 일이다. 요즘 같으면 대체로 이른 결혼이라 했을 텐데 당시에는 그랬다.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동네 사람 가운데 JJ형의 모습도 커튼에 어른거린다.

연초 휴일에 함께 바람을 쐬러나갔던 호수의 풍경도 삼삼하게 그려진다.

나보다 세 살이 많은 형은 세퍼트를 키우는 집 셋째아들이었는데 나에겐 언제나 세상의 색다른 멋을 알려주는 멘토였다. 우리는 여름철에는 장마가 쓸고 지나간 개울에 나가 수정을 캐거나 6.25 때 소모된 총알이나 탄피를 주워서 엿을 바꿔먹기도 했다. 맑은 겨울날엔 형네 집 마당에다 깡통을 세워놓고 엽총으로 사격 연습도 했다. 그런 날 밤엔 형의 골방에 누워서 천장 위에서 뛰노는 쥐들을 향해 엽총을 쏘기도 했는데 한 마리도 잡지는 못했다. 설혹 쥐가 총알에 맞았다하더라도 칼로 천정을 찢고 꺼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JJ형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가정형편상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고 음악 전공자도 아니었지만 나팔을 잘 불었다. 기타도 잘 쳐서 음악학원을 차려놓고 사람들에게 색소폰과 기타를 가르쳤다.

몇 년 전인가, 아내와 함께 형이 운영하는 음악학원에 들렀더니 나에게 기타 치는 취미를 가져보라며 간단히 주법을 알려주었다.

“기타를 치려고 하지 말고, 기타에 몸을 맡기듯 편안히 기대봐.”

그리고 기타의 기본적인 코드를 알려주며 시(詩)를 읊을 때 시어의 이미지에 맞는 코드를 잡고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기타 줄을 긁어보라 했다.

그날 이후 기타를 쳐보려고 한동안 시도를 해봤지만 음감이 없는데다 게으르기까지 하여 실행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형의 말은 내 삶의 이정표가 돼주었다. “세상엔 두 개의 세계가 있다. 언더그라운드와 오버그라운드…” 라는 또 다른 조언과 함께.

L선배의 모습도 그려진다.

10년 전에 헤어진 직장선배다. 지난달 입춘 무렵, 선배가 ‘언제 점심이나 하자’고 전화를 해서 날씨가 좋은 날 전철을 타고 가서 만났다.

L선배는 충청북도 C시가 고향인데 S시에서 나와 함께 직장생활을 하다 퇴직할 무렵, 아내가 암 투병을 하게 되어 요양 차 강원도 C시로 이주하여 작은 농원을 가꾸며 여생을 보내고 있다. 선배는 저녁엔 동생네가 운영하는 카페에서 바리스타로 겸업(?)을 하기도 한다는데 그날은 오전에 병원에 다녀오는 길이라 했다. 마침 선배의 아내가 암이 완치되었다는 검사결과를 통보받아 흐뭇하게 만날 수가 있었다.

그날은 공교롭게 선배의 단골 닭갈비집이 휴업이라 기차역 인근 순대국집에서 순대전골을 끓이며 지난날을 훈훈하게 회상했다. 그리고 C시의 변화하는 풍경에 대해서도 정겹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치 L선배가 내 대신 고향을 지켜주는 것 같아 미안하고 고마웠다.

세상엔 두 가지, 고향을 떠난 사람과 고향을 지키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고향을 떠난 사람이나 고향에 사는 사람이나 서로 그립고 보고 싶어 한다. 왜 그럴까? 이유는 잘 모르겠다. 다만, 장모님이 휴대폰을 여기저기 누르시기 전에 내가 먼저 전화를 걸어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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