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낭만 ‘노튼 모터사이클’

입력 2020.08.03 15:30 조회수 6,165 0 프린트
체 게바라가 포데로사로 불렀던 39년형 노튼 500.

체 게바라가 남미 대륙을 여행할 때 늘 그와 함께했던 모터사이클이 바로 노튼의 ‘포데로사’였고, 30년이 넘는 바이크 라이프를 즐기고 있는 헐리우드의 유명 배우 키아누 리브스가 바이크에 입문하게 된 모델이 노튼의 ‘코만도’라고 익히 알려져 있다. 시대를 관통하는 노튼에는 어떤 매력이 있는 것일까.

노튼의 시작
역사상 가장 유명한 영국의 모터사이클로 손꼽히는 브랜드 중 하나인 ‘노튼(Norton)’은 1898년 제임스 랜스다운 노튼(James Lansdowne Norton)에 의해 버밍엄 지역에 설립되었다. 노튼의 첫 번째 모터사이클은 노튼이 디자인하고 설계한 차체에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엔진을 구입하여 사용함으로써 4년 후인 1902년에 제작되었다.  
1907년 렘 파울러는(Rem Fowler)는 프랑스의 푸조 엔진이 장착된 노튼 모터사이클을 타고 최초의 Isle of Man TT에서 트윈 실린더 분야 우승을 거머쥐었다. 이듬해인 1908년 노튼은 1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다양한 사이드 밸브 싱글 엔진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1차 세계 대전 전에 수많은 세계 속도 기록을 보유하면서 스포츠 바이크 브랜드로 명성을 얻었다. 전쟁 기간 동안 생산이 중단되기도 했었지만, 1919년에 생산이 재개되면서, Isle of Man TT의 치열한 경쟁에서 계속해서 승자의 자리를 공고히 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36년부터 1945년까지 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에는 군에 납품할 모터사이클을 생산하는데 전념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1947년부터 1954년까지 노튼은 매년 시니어 TT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1949년에 오늘날의 MotoGP 시리즈의 선구자인 모터사이클 월드 챔피언십이 시작되었으며, 노튼은 1949년 6월 17일 Isle of Man Senior TT에서 승리한 해롤드 다니엘(Harold Daniell)이 함께하면서 최초의 500cc급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노튼은 그랑프리 경주 초기에 메이저 플레이어이기도 했다. 1951년 500cc 타이틀을 차지한 제오프 듀크(Geoff Duke)와 함께하여 우승했고, 이탈리아의 멀티 실린더를 장착한 MV Agusta나 Gilera가 경주를 지배하기 시작했을 때도 노튼은 여전히 개인 라이더들에게 신뢰할 수 있고 경쟁력 있는 옵션을 제공함으로써 메이저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깃털처럼 가벼운 ‘페더베드’프레임
1950년대부터 1960년대에 영국의 모터사이클은 그야말로 황금기를 누렸다. 1949년에 출시한 500cc 트윈 모델인 ‘도미네이터’는 엄청난 호평을 받았으며, 경주용 바이크로는 지금까지 회자 되는 새로운 ‘페더 베드’ 프레임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페더 베드’ 프레임 개발을 통해 노튼 역사에서 한층 더 업그레이드 되는 전환점을 맞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북아일랜드의 레이싱 형제 렉스와 크로미 맥칸들(Cromie McCandless)이 디자인 한 ‘페더 베드’는 1950년 해롤드 다니엘이 처음 테스트한 후 마치 ‘깃털에서 타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는 표현에서 별명을 얻게 되었다. 황금기의 영국에서 카페레이서 모터사이클에 열광하던 영국의 젊은이들이 갈망하던 것은 더 빠르고, 날카롭지만 안정적인 핸들링의 성능이었다. 이미 Isle of Man TT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종횡무진하던 노튼은 당시 고객들의 욕구를 반영한‘깃털처럼’ 가벼워진 중량과 더욱 강력해진 프레임은 당연히 레이싱에서 성적으로도 입증되었다. 이 ‘페더 베드’ 프레임은 당시 모터사이클 프레임의 디자인에 큰 영향을 주었고, 훌륭한 핸들링을 제공했다. 영국 내 경쟁 브랜드 중에서 가장 소규모의 업체였음에도 불구하고 트라이엄프와 BSA와의 경쟁에서도 밀리지 않는 입지를 마련해줬다. 당시 스페셜 빌더들은 트라이엄프 엔진에 노튼의 프레임을 사용하여 ‘트라이튼(Triton: Triumph + Norton)’이라는 새로운 카페레이서 장르까지 유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모터사이클 마니아로 유명한 키아누 리브스도 노튼 모터사이클을 즐겨 탔다.
 

노튼의 위기와 기회
성공 가도를 달리는 것만 같던 노튼은 1953년에 AJS, Matchless, Francis-Barnett 및 James 브랜드를 소유한 AMC(Associated Motorcycles)에 팔린다.
노튼의 프레임 기술은 1968년 750cc 코만도가 등장했을 때 고무 마운트가 장착된 엔진과 기어 박스가 모터에서 발생하는 진동을 억제하면서 한 단계 더 발전했다. 코만도는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지만, 첨단의 일본 모터사이클의 등장은 영국의 모터사이클 시장을 뒤흔들었고, 1970년대에 널리 퍼진 산업 활동과 함께 노튼 뿐 아니라 다른 영국의 제조 업체들은 힘든 시기에 직면했다.
1972년 이미 재정 악화를 겪던 BSA는 트라이엄프와 인수합병을 마쳤고, 1973년 노튼 역시 일본 브랜드와의 경쟁력 약화로 트라이엄프-BSA가 제안한 인수합병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합병 당시 노튼이 경영권을 맡게 되었고, 세 회사의 합병된 이름을 ‘노튼 빌리어스 트라이엄프(NVT)’로 이름을 바꾸었다. 하지만 NVT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노후화된 생산설비와 노사 갈등 그리고 무엇보다 일본 브랜드와의 경쟁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70~80년대에 노튼은 암전의 시대를 보냈고, 1990년 말 노튼에 열광했던 애호가 미국의 케니 드리어(Kenny Dreer)에 의해 노튼의 권리는 결국 미국 회사에 넘어갔고, 거기에서 새로운 961cc 코만도를 개발했다. 하지만 영국인 기업가 스튜어트 가너에 의해 2008년 노튼은 결국 고향인 영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올해 1월 클래식 모터사이클의 대명사인 노튼 모터사이클이 법정관리에 들어갔다는 소식은 전 세계 클래식 바이크 팬들을 충격에 휩싸이게 했다. 한화로 약 4억 6천만 원(30만 파운드)에 가까운 세금을 체납했는데, 문제는 이 정도의 세금도 지불 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법정관리에 들어간 지 3개월 만에 인도의 모터사이클 브랜드인 TVS가 한화로 약 243억원 (1600만 파운드)에 노튼 모터사이클을 인수했다. 
영국의 자존심이었던 노튼 모터사이클이 인도에서 다시금 부활하여 예전의 영광을 오래도록 누리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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