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조는 1776년부터 1800년까지 25년간 왕위에 있었다. 이 기간에 영국에서는 세계사의 대격변을 몰고 온 산업혁명이 시작되었고, 미국은 독립전쟁(1776년)에서 승리하였다. 1789년에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으며, 중국은 건륭제의 시대로 60년 재위 동안 사회는 안정되었고 수도 북경은 서양의 상인과 선교사들로 넘쳐났다. 청을 오랑캐라 깔보며 명나라 연호를 쓰는 것으로 스스로를 위안하던 조선의 유학자들에게도 세계의 변화는 감지되었다.
북경을 통해 들어온 새로운 학문, 천주교, 새로운 기술과 기기들은 충격 그 자체였고, 상당수의 유학자들은 조선이 개혁되어야 한다는 데로 생각이 발전하였다. 실학의 대두였다. 그러나 그런 주장을 하는 이들은 대부분 재야이거나 조정에 몸담고 있다 해도 실력자들은 아니었다. 조선 후기의 조정은 서울과 경기, 호서 출신들이 지배했는데, 영조 조에 와서는 호서 쪽도 미약해지고 서울과 경기, 특히 서울의 독무대로 변해갔다. 그들 내에서도 권력 독점을 위해 당파 간의 치열한 혈전이 계속돼온 터, 경종 지지와 영조 지지로 노 소론이 치열한 싸움을 벌인 것처럼 이미 신하들은 왕위조차도 자신의 입맛에 맞게 선택하려 들었다. 어지간한 정치 역량을 보유하지 못한 왕은 허수아비로 전락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왕권은 추락해 있었다. 지방 사족들에게 중앙 벼슬은 이제 먼 나라 이야기가 되었다. 그런데 과거 급제를 위한 첫 관문인 지방의 초시는 더욱 과열되었으니, 양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서나, 기득권을 지키거나 돈 주고 산 양반 대접을 받기 위해서였다. 시험장마다 수백 명, 많게는 수천 명이 넘는 응시자가 몰렸고, 답안을 미리 준비하거나 대리 응시하는 등 부정이 속출하였다. 몇 안 되는 시험관들은 모두 채점할 수 없어서 미리 제출한 답안지 중에서 합격자를 뽑곤 했는데 답안지를 먼저 제출하기 위한 경쟁은 마치 전쟁터를 방불했다.
지방 수령은 주로 음관, 무신이 맡았다. 이들은 수령이 되는 순간부터 수탈과 치부에 혈안이 되었다. 과거 그들의 가장 손쉬운 치부 수단은 공납이었다. 대동법의 실시로 그 길이 막히자 이번에는 군포가 주된 치부 수단이 되었다. 균역법의 시행으로 이마저도 어렵게 되자, 상인, 공인들에게 허다한 명목으로 세를 거두거나 노골적으로 고리대금업을 하기도 했다. 거의 모든 수령, 변장들이 애용한 치부책은 환곡을 이용한 것이었다. 자연감소분 등을 고려해 1할을 더 거둬들이던 것이 이때에 이르러서는 2~3할을 거둬들이는 것이 상례가 되었다. 실로 대단한 수익률이어서 수령들의 사익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재정이 열악한 관청들, 병영들이 앞을 다퉈 재정 확보 수단으로 곡식을 준비해 환곡 장사에 나섰다. 어느새 환곡은 백성이 의무적으로 빌려야 하는 강제 세금으로 변질되고 만 것, 그나마도 빌려줄 땐 쭉정이로, 받아들일 땐 실곡으로 받는 일이 허다해서 아예 이자에 해당하는 분량을 빌려주지 않은 채 거둬가는 방식이 오히려 선호되기도 했다. 그렇게 환곡은 이 시대 백성에게 가장 큰 폐해로 자리 잡고 말았다.
정조는 자신의 앞에 놓인 시대의 흐름과 병폐의 심각함을 잘 알고 있었다. 아비의 죽음과 세손 시절을 견뎌냈고, 즉위하자마자 척신들을 과감히 처리한 데서 보이듯, 그는 엄혹한 시대를 감당할 만큼 강인하고 결단력이 있었다. 군주로서의 사명감도 투철하고 백성을 사랑하였다. 정조 10년, 홍역이 크게 유행했는데, 사랑하는 자식인 문효세자도 이때 잃었다. 왕은 슬퍼할 겨를도 없이 백성의 구료 실태를 점검하느라 바빴다. 검소하고 성실했으며 몸가짐은 반듯했다. 그는 평생 책과 붓을 놓지 않은 학자이기도 하다. 세손 시절 이미 신하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던 그의 학문은 어느새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정조가 내건 최우선 목표는 사대부 정치 복원이었다. 그런데 파트너인 사대부들에게 적잖은 문제가 있었다. 잘못된 문풍에 물들어 있고 당색에 찌들어 있었다. 정조가 문풍 바로잡기를 무엇보다 앞세웠던 이유다. 당색 제거를 위해 내건 의리 탕평에는 왕의 자신감이 묻어난다. 정조 시대의 상징인 규장각 설치의 가장 큰 이유도 사대부 정치 부흥에 있다. 왕은 사대부들의 실태를 말하고 문풍 진흥을 위한 방도로 규장각을 세웠다는 것을 말했다. 규장각이 외부적으로 내건 목적은 역대 왕들의 글과 글씨 등을 정리, 보관, 출판하고 중국과 국내의 서적들을 보관하고 연구와 출판 작업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왕은 그 과정을 통해 당색에 물들지 않은 신하들을 길러 내려 했던 것이다.
규장각 관원들은 당색을 가리지 않고 뽑았으며, 초계문식제도라 하여 유능한 당하관들을 뽑아다 공부시키고 시험도 보곤 하였다. 정조는 제도화, 규범화를 중시했다. 아마도 제도와 문물이 잘 정비되었던 세종 때를 모델로 삼았던 것 같다. 이후 세상은 많이 변했고, 특히 양란을 거치며 제도는 엉망이 되어버렸다.
경장에 대해 적극적 사고를 가졌던 왕은 실제로도 중요한 경장 정책을 실시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금난전권 폐지이다. 조정은 육의전에 조정의 필요 물품을 대도록 하는 대신 금난전권이라는 특권(허가받지 못한 가게들은 장사를 못하게 하는)을 주었다. 상품경제가 발달하면서 곳곳에 자연발생적으로 난전들이 생겨났다. 그러나 그들은 금난전권을 내세운 시전 상인들에게 물건을 싼 값에 강매 당하는 피해를 보아야 했다. 이에 정조 15년 체제공이 그 실태를 아뢰고 금난전권의 폐지를 청한 것이다. 신하들도 대부분 찬성하면서 금난전권은 완전히 폐지되었다. 왕은 공노비의 처지 개선에도 많은 관심을 쏟았다. 즉위 초 추쇄관을 혁파하자, 합법적으로 도망 노비를 쫓을 수 없게 된 각 관청들은 남은 노비들에게 도망 노비의 몫까지 징수하였다. 이에 왕은 지속적으로 그런 폐단에 대해 경고를 보냈으며 서얼들의 진출에도 힘을 썼다. 정조 1년에는 서얼허통법을 마련했고, 실행 과정도 제대로 살폈다. 정조의 정치에서 여러 개혁 조치보다 더욱 빛나는 것은 지속적으로 치밀한 관리라 하겠다. 백성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나서는 모든 문제를 깊이 파악했다. 가장 중점을 둔 일은 수령들 단속이었다. 말로만 끝내지 않고 줄기차게 암행어사를 보내 점검했다. 어사를 내려보낼 때 언제나 매우 구체적이고 상세한 지침을 내렸다. 부정이 적발된 수령들은 물론, 제대로 적발하지 못한 어사들에게도 벌을 내렸다. 여러 개혁조치들의 집행 과정과 흉년 때 굶주리는 자들의 구제에 대해서도 지속적으로 꼼꼼하게 살폈다. 때문에 수령들은 긴장했고, 백성은 그만큼 편안할 수 있었다.
조선의 왕들 중 평생 공부를 손에서 놓지 않은 왕은 세종대왕과 정조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늘 공부를 하였기 때문에 유연한 정치를 하였고 많은 업적을 남겼다. ‘공부를 손에서 놓지 않는다’라는 말은 참 쉬운 말이지만 어려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