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수 시인의 문화 산책] 꽃의 새해

M스토리 입력 2025.02.17 16:53 조회수 1,021 0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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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질항아리가 책장 위에 놓여있다. 어머니가 쓰시던 유품이다. 가끔 들꽃을 꺾어다 꽂았던 것인데 오늘따라 왠지 외롭고 쓸쓸해 보인다. 마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지난 한 해 동안 무엇인가에 부심했던 마음을 다 비우고 안일하게 새해를 맞이하는 것처럼…

그랬다. 지난해에는 재미있는 글을 좀 써보려 했는데 감성과 능력이 부족한 탓에 게으르기까지 하여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었다. 하여 가슴깊이 반성하며 새로운 각오로 휴일에 아내와 함께 둘레길 산책에 나섰다. 등산화 줄도 바짝 졸라맸다. 하지만 생각처럼 산책이 여의치 않았다. 지난해 말에 펑펑 숨 막히게 내린 눈으로 하여 온 산에 소나무가 설해를 입어 부러지고 넘어지고 산길 곳곳이 험난해졌던 것이다. 나뭇가지를 헤치며 걷노라니 솔가지에 다리가 긁히고 아내는 꺾인 가지에 머리를 찔렸다. 하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산골짜기 여기저기 쓰러지고 꺾여 속살이 드러난 소나무들을 바라보며 걸었다. 걷다보니 법정 스님의「설해목(雪害木)」이란 수필이 생각났다. 모진 비바람에도 끄떡하지 않던 소나무들이 사쁜사쁜 내려 쌓이는 하얀 눈에 의해 꺾이는 현상을 들어 자연의 무상함과 삶의 순리를 일깨워주신 감동적인 글이다.

설해목의 의미를 실감하며 걷는데 이번엔 팥배나무의 잔해가 눈에 띄었다. 소나무 밑에 자생하고 있다가 덩달아 부러져버린 것이다. 그냥 지나치자니 왠지 억울하게 부러진 팥배나무의 생가지와 붉은 열매가 가여웠다. 하여 아내와 함께 흩어진 가지를 몇 가지 주워서 집에 돌아와 질항아리에 꽂아 보았다. 일순 팥배나무가 다시 살아난 것 같았고 거실 안이 훈훈해진 느낌이 들었다. 팥배나무가 폭설을 겪고 우리 아파트 거실에 와서 비로소 숨을 고르고 쉬는 듯했다. 가슴이 뭉클했다.

그 느낌은 다음날 Y시에 있는 사무실로 출근할 때까지 나를 흥겹게 했다. 욕심이 났다. 하여 점심시간에 사무실 인근 야산에 올라가보았다. 그 산에도 역시 온통 소나무가 쓰러지고 갈라지고 풍경이 말이 아니었다. 걷기에 불편했지만 이곳저곳을 다니며 팥배나무를 찾아보았다. 후미진 산비탈에도 가보았다. 그러나 허사였다. 팥배나무가 자생할만한 산이 아니었던 가보다. 허탈한 기분으로 비탈길을 걸어내려 오는데 지난 가을에 직원들이 사무실 주변 잡초를 제거할 때 함께 베어낸 찔레덩굴이 눈에 띄었다. 비록 가지가 잘리고 서리와 눈을 맞아 시들고 퇴색했지만 아직 붉고 성성하였다. 하여 곧바로 찔레가시에 찔려가며 몇 줄기 꺾어다 유리화병에 꽂아보았다. 어둡던 사무실이 갑자기 밝아진 느낌이 들었다. 무채색 공간이 찔레열매의 낯빛으로 채색된 것 같기도 했다.

하여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 SNS에 올려보았다. 지인들이 공감한다는 댓글을 달아주었고 이모티콘도 보내주었다. 오늘 하루가 즐겁고 새로워진 기분이 들었다.

사실 나는 꽃꽂이를 어떻게 하는 줄 몰랐었다. 그저 아내가 한때 취미로 꽃꽂이학원을 다니며 배우는 것을 곁눈질로 훔쳐보았고, 어릴 때 어머니가 들에 핀 꽃을 꺾어다 물병에 꽂아두고 바라보시던 것을 기억하는 정도였는데 꽃을 꽂다보니 요령이 조금은 생긴 것 같다. 아내나 어머니가 그러셨듯이… 여성 호르몬이 비등해지는 나이가 되어서 그런가 아니면 꽃을 자주 만나게 되는 환경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꽃과 어울려 살게 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다.

그래 그런가, 유튜브 프로도 꽃과 관련한 내용을 찾아보게 되었다.

“꽃의 아름다움이란, 사라지는 아름다움이기도 하다.”

꽃꽂이를 소재로 한 일본영화 <성형미인>의 주인공 후지시마의 말이다.

그는 ‘꽃꽂이는 꽃의 생명을 끊는 것부터 시작하여 꽃을 꽂는 게 아니라 사람을 꽂는 것’이라 했다. 하여 “동심 그대로 거칠게 꽃을 꽂아도 좋다.”고도 했다. 마치 내가 화병과 질항아리에 아무렇게나 내 마음대로 재미있게 꽃을 꽂는 것을 인정해주는 것 같은 반가운 한마디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가하면 지난해 12월에는 강원도지방신문 K일보에서 미술작가 P의 기사를 읽고 공감했다.

미술작가 P가  C시에서 ‘버려진 꽃이나 나뭇가지를 거두어 작품의 피사체로 녹여내며 그들의 마지막을 함께 했다’는 취지로 작품전을 열었던 것이다. 그는 “선택받고 버려지는 모든 존재들을 불행한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고픈 연민에서 시작된 작업”이라고 작품에 대해 설명하기도 했다. 멋진 의미가 아닐 수 없다. 버려진 꽃이나 나뭇가지 혹은 열매를 화병에 꽂는다는 것이 단순히 그것을 감상하는 것으로 끝내는 게 아니라 예술로 승화시키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버려진 꽃을 거두고 열매를 이곳저곳 옮겨주는 것 역시 꽃이나 열매의 원초적 소명을 함께 실행하는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내가 지난해에 하지 못했던 생각과 작품을 그가 대신 생각해주고 제작해준 것만 같았다.

그가 고마웠다. 마치 나도 그처럼 미술 작가의 반열에 들어선 것 같았고 앞으로 살아갈 새해의 의미를 그가 찾아준 것만 같았다. 하여 법정 스님처럼 누군가에게 삶의 의미를 갖게 해줄 수 있는 성찰의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은 희망도 갖게 되었다.

올해 기사년(己巳年)에도 눈 폭설 같은 숨 막히는 일들이 발생할지 모른다. 그로인해 또 어떤 나무가 부러지고 꽃들이 버려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걱정할 일이 아니다. 나 그리고 또 누군가가 그것들과 함께 할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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