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수 시인의 문화 산책] 새해 만행(萬行)

M스토리 입력 2025.01.28 12:25 조회수 1,275 0 프린트
Photo by Erik Odiin on Unsplash
 
 






새해가 밝았다. 새해가 되면 누구나 흔히 한 해 동안 실행할 계획을 생각하게 마련이다. 구체적이든 막연하든...
해야 할 일이나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해볼 것이고 만나볼 사람도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여행계획도 세울 것이다. 가보고 싶었던 곳이나 추억의 장소나 어디든... 
어느 노인은 죽기 전에 다시 한 번 더 가보고 싶은 곳이 있다 했다. 그곳에서 누군가를 다시 한 번 꼭 만나보고 싶다며...

하루는 내가 “어디를 여행하면 좋을까?”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러자 추운 겨울이니 아프리카나 동남아가 좋을 거라느니 열사의 사막이나 하와이 해변이 좋다느니... 다양하게 추천을 해준다. 그러다 짓궂게 달나라나 화성은 어떠냐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웃자고 하는 농담이겠으나 언중유골(言中有骨), 농담 속에 진실이 있다고 누구나 자기가 가보고 싶은 곳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런가하면 절대로 ‘절벽이 있는 곳에는 가지 말라’고 조언하는 친구도 있었다. 나이가 들면 운동신경이 둔해지고 정신이 깜빡거려 자칫 발을 헛디딜 수 있고 배우자가 생명보험을 들어놓고 등 뒤에서 밀어버릴 지도 모른다고 해서 한바탕 웃었다. 그랬다. 누구나 여행에 대해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었고 희망차게 새해를 시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행은 무작정 떠나는 게 묘미가 아닐까!

임어당이 그랬다. ‘여행은 방랑’이라고. 하여 “참된 여행이란 세상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어야 한다.”고. “아무런 의무감 없이 시간에 쫒기지 않고, 누구의 도움도 없이 훌훌 털고 떠나가는 목적 없는 길이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하지만 나의 여행은 언제나 계획된 것이었다. 그것도 일가친척집을 순례하듯 해마다 방학 때가 되면 어머니와 함께 떠났던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이제는 어머니 대신 아내와 함께 여행을 한다. 결혼이나 장례 같은 친인척이나 지인들의 대소사에 참석하기 위해 즐겁게 또는 슬픈 심정으로 떠나는 참례여행이다.

지난주에는 설날에 즈음하여 강원도 C시에 있는 누님 댁엘 다녀왔다. 누님의 안부도 살피고 마침 누님네 손자가 대학에 수시 합격을 했다하여 축하해주기 위해서였다.
지난 해 봄에는 아내의 조카딸 그러니까 큰처남네 큰딸 결혼식엘 참석하기 위해 충청남도 D시엘 다녀왔다. 그런데 몇 달 후엔 그만 그 큰처남이 암 투병을 하다 작고하여 또 경기도 S시에 있는 대학병원 영안실엘 급히 다녀와야 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즐거운 일 뒤에는 더러 가슴 아픈 흉사가 따르는 게 우리의 일상(日常)인가보다.
그렇듯이 또 지난해 11월엔 지인의 부음도 있었다. 전 직장 친목회원들과 일본 후쿠오카와 벳부엘 다녀온 며칠 후의 일이었다.
몇 년을 벼르고 별러 떠난 해외여행이라 몹시 설레었던 만큼 함께 일본의 맛집을 돌아다녔고 개운하게 온천욕도 하며 못 다한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새 정해진 일정이 훌쩍 지나갔다. 다들 좋았는지 도중에 향후 여행계획까지 미리 세우기도 했다. 몽고 초원에 가서 별을 보자거니, 크루즈여행을 가자거니, 멀리 유럽 대륙을 돌아보자 거니... 즐겁고 희망찬 여행이었다.

하지만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지 며칠 되지 않아 J회원이 교통사고로 운명을 달리했다는 부음을 듣게 된 것이다. 하여 송년회를 추모회로 치르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었는데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가야할 운명이란 여행길을 그가 먼저 유언도 남기지 못하고 훌쩍 떠난 것 같아 눈시울을 적시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쩌면 우리는 알 수 없는 곳에서 와서 여기저기 여행을 하며 살다 어느 날 갑자기 저승인 땅속이나 하늘로 다시 먼 여행을 떠나야하는 게 아닐까싶다!
기구하달까, 아니면 허무하다 할까!
그런 여행 가운데 그래도 기억하고 싶은 특별했던 여행이 누구에게나 있을 법하다. 나 역시 봄만 되면 시외버스를 타고 남해의 어느 섬에 출장 갔던 봄날을 잊을 수가 없다.
처음 직장에 들어갔던 시절이었다. 업무출장으로 가게 된 남해 고도의 봄은 참말이지 경치도 아름다웠지만 밝은 봄볕에 빛나는 바다의 윤슬이 좋았고 무엇보다도 훈훈했던 봄바람의 숨결을 잊을 수가 없다.
하여 ‘언젠가는 그곳에서 살아봐야지!’ 하고 생각했지만 생각은 생각일 뿐, 안타깝게도 실행할 수가 없었다. 직장 때문이었지만 또 한편 아내의 취향 때문이기도 했다.
 
아내는 바다가 무섭다 했다. 파도도 무섭고 섬처럼 외로운 것도 싫다 했다. 나만 그런가? 하고 주변을 알아보았더니, 아니었다. 친구 Y도 현재 내가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Y시에 가끔 찾아와 만나곤 했는데 퇴직하여 봄바다를 그리워하는 나처럼 고향인 Y시에서 추억처럼 살고 싶다 했다. 그런데 부인과 딸이 현재 살고 있는 S특별시의 강남을 절대 떠나지 않겠다고 고집하여 실행하지 못한다고 낙담하는 것이었다.
결국 여행하는 곳과 사는 곳이 다른 게 나와 주변 사람들의 삶인가싶다!

여하튼 새해에는 즐거운 곳이든 험난한 곳이든 여행을 하게 될 것이다. 다정하고 좋은 사람뿐 아니라 불편하고 괴로운 사람과도 함께해야할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여 자비로운 신의 발자취를 따라 가듯 여행이 인내하고 성찰하는 명상의 여정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라는 말이 있다. 집, 사랑, 가족, 친구, 재물 등 인간적 욕망을 모두 떨치고 살아가라는 성자의 가르침이다.
어쩌면 우리의 세속적인 삶은 성자가 걸어간 성스러운 길을 따라 걷고자 노력하는 만행(萬行)이지 싶다.
새해에는 모두가 건강하게 즐거운 만행이 되길 기원해본다.

 

 

 

M스토리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