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벅터벅 사색(史索) 중] 탕평(蕩平)책

M스토리 입력 2025.01.28 10:07 조회수 1,097 0 프린트
영조 어진

<서경>에는 다음의 구절이 나온다. 무편무당(無偏無黨) 왕도탕탕(枉道蕩蕩) 무당무편(無黨無偏) 왕도평평(枉道平平)이란 말로 ‘치우침이 없고, 무리 지음도 없으면 왕도가 탕탕 평평해질 것’이라는 뜻이다.

선조 말 동서분당 이후부터 시작된 당쟁은 왜란이 수습되면서 더욱 어지럽게 전개되어갔다. 파당 간의 싸움에서 당론은 국가의 안위나 민생의 휴척(休戚 : 편안 함과 근심)에 관계되는 정책이 아니었다. 주장의 대부분은 왕실의 복상제(服喪制)와 같은 의례적인 문제 또는 세자책봉, 왕비 책립과 같은 궁중의 변동을 계기로 삼아 다른 정파를 배제해 정권만 장악 하려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따라서 대립하는 파당 간의 싸움은 격렬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파당 간의 싸움에서 성공하면 권세를 누리고 실패하면 귀양을 보내거나 주륙(誅戮 : 죄인을 죽임)이 뒤 따르는 것을 알면서도 당쟁은 계 속되었다.

더욱이 조선 후기로 오면서 당파의 세력이 서로 강화되면서 일당의 전제로 진행되는 정국 현상도 일어나 왕권을 약화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정국 하에 ‘탕평(蕩平)’이라는 용어를 정치무대에 처음 제기한 사람은 1683년(숙종 9년) 박세채이다. 그는 1694년에 영의정으로 또다시 탕평을 제기하였다. 그는 격렬해져 가는 노·소론간의 당쟁을 조정 하려는 목적에서 파당의 타파를 주장하였다. 당들이 임금의 뜻보다 당론을 앞세우고 사생결단식 싸움을 하게 되면 왕권은 약화되기 마련, 이에 부왕 숙종은 환국이란 방식을 써서 일진일퇴를 시키면서 왕권을 키웠다. 언뜻 성공적인 전략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본래 군신 관계는 이 보다도 훨씬 일반적인 주문이 통하는 관계다. 오직 무조건적인 충성만이 신하의 몫인데, 소론과 노론이 서로 다른 이를 왕을 추대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내린 결론이 탕평이었건만, 현실에서는 노론에게 선택되어 보위에 오른 처지였다.

이러한 탕평이 다시 강조되고 그 이념을 하나의 정책으로까지 추진하는 정치집단이 형성되어서 탕평이 하나의 역사적인 용어로 확인된 것은 영조대였다. 영조는 당쟁의 폐해가 국가에 미치는 해악을 실감하였다. 그리고 세제 책립과 대리청정의 시비로 노·소론 간의 분쟁이 격심해 신임사화라는 당화를 몰고 온 폐해를 직접 경험한 장본인이었다. 따라서 탕평책은 이것을 반성하는 입장에서 나온 정치이념이요, 예방책이었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할 때는 자신의 세제 책립과 대리청정을 바라지 않던 소론의 영수 이광좌가 정권을 잡고 있었다. 영조는 즉위 하자마자 바로 탕평책의 서곡인 당쟁의 폐해를 하교하였다. 이어 소론의 영수 김일경, 남인의 목호룡 등 신임옥사를 일으킨 자들을 숙청하였다. 그리고 노론을 다시 조정에 불러들였다. 그러나 영조 자신이 의도한 탕평 정국의 바람과는 달리 노론의 강경파들이 소론을 공격하는 파쟁이 다시 고개를 들자 1727년 노론의 강경파들을 축출하였다. 인사정책으로 타당을 견제시키는 쌍거호대(雙擧互對)의 방식을 취하였다. 즉, 노론을 영의정에 앉히면 좌의정은 소론으로 하여 이를 상대하면서 그 밑의 청요직도 이와 같은 인사 정책을 써서 서로를 견제하였다. 그리고 이들 인물의 기용도 각 파당 내의 강경론자들을 배제하고 탕평론자들로 구성시켰다. 격렬해지는 당론을 수습하고자 고르게 인물을 등용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완화된 정국을 이끌어갈 수 있었다. 이러한 정국 기반을 바탕으로 이제는 재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는 유재시용(惟才是用)의 인사정책을 단행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정국이 전개되자 노론, 소론, 남인, 소북 등 사색을 고루 등용했고, 이제 영조대 중반에 탕평국면은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 갔다.

영조는 초·중반기에 왕론탕평으로 파당 간의 병진을 기본 바탕으로 하였다. 그러나 탕평 정책 기반의 확보 과정에서 노론의 우위를 피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탕평책은 노·소론간에 청류를 자처하는 강경파들의 반대에 부딪혔으며, 영조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혼인 관계를 통해, 특히 온건한 노론 계 대신들과 유대를 맺어 지지세력을 삼게 되었다. 영조는 파당 간의 격심한 대립을 일단 수습했으나, 수습의 직접적인 수단을 혼인 관계에서 찾았기 때문에 정국 운영에 척신의 비중을 높이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탕평 정국을 다져온 가운데서도 내면으로는 당쟁의 파란이 계속되었다. 일례로 영조는 즉위 하자마자 노론을 정계에 등장시켜 탕평 정국을 급히 서두르다가 1728년에 정계에서 밀려난 소론, 남인들의 반발 세력이 주동이 된 이인좌의 난을 겪었다. 1755년에는 을사처분 때 귀양을 가서 20여 년 동안이나 한을 품어온 소론 윤지 등이 주동이 되어 나주괘서 사건을 일으켰다. 이듬해 토역과를 시행할 때 답안지에 소론계 인물들이 조정을 비방하는 글을 써서 물의를 일으켰다. 그 뒤 1762년에는 탕평책에 따라 다시 조정에 들어온 남인과 노론 정권 위에 미약한 자리를 차지해온 소론 등이 장현세자를 등에 업고 정권을 잡으려다가 이를 간파한 노론의 계교로 뒤주 속에 세자를 가두어 죽이는 참사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영조대 중반부터 후반까지 척신으로 당을 이룬 남당과 북당, 그리고 청류를 자처하는 동당이 정국 구도를 이룬 가운데 즉위한 정조는 노론의 우위 여부를 문제 삼는 기존의 두 척신당의 틈바구니에서 왕정체제 확립의 한계를 직시하였다. 또한 이러한 탕평책은 결과적으로 세도정치의 기반을 마련해 주기에 이르렀다.

현재까지 끊임없는 당쟁을 통해 저들만의 이익을 챙기려 했음이지, 정치가들은 백성을 위하거나 나라를 위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지 않은가. 탕평(蕩平)이란 좋은 이름은 그저 옛 시구에나 나오는 구절이다. 저들만의 이익을 위한 희생양이 되지 않기 위하여 올바른 철학을 가져야 되겠다.
황춘식
M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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