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해가 밝았다. 하지만 지난해에 해야 할일을 빼먹은 것 같은 왠지 허전한 기분이다.
문득 이웃 농부들과 송년인사를 나누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 점심시간에 사무실 밖으로 나가 농부들이 사는 곳으로 가보았다. 그러나 어디 멀리 여행을 떠났는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잘 정돈된 논과 밭이 환하게 가슴을 펴고 반갑게 맞아준다.
나는 밭둑을 걸으며 <농부인심>으로 훈훈했던 지난 계절을 회상해보았다.
우리사무실에서 한 마장쯤 될까, 가장 가까운 이웃집 김씨네 부부는 정겹고 깔끔하게 농사를 짓는 농부커플이다. 그들은 각종 채소와 감자, 고구마 등 밭농사를 지었는데 여름에 고추와 깻잎 그리고 고구마줄기를 먹을 만큼 따가라고 허락해주었는가 하면 편하게 어디든 나다니라고 자전거도 한 대 제공해주었다. 고물상을 하는 김씨 남동생이 가져다준 것이었는데 구형자전거였지만 출·퇴근은 물론 휴일에 가끔 이웃마을 나들이할 때 유용하게 쓰고 있다.
그리고 그 아랫집 농부 심씨 역시 간장고추지 담그라고 풋고추를 한 보따리 따주었는가 하면 하지감자와 찰옥수수도 한 자루 씩 안겨주어서 온 가족이 며칠 동안 맛있게 쪄먹었던 즐거운 여름이었다. 게다가 심씨는 늦가을에는 무와 배추도 많이 뽑아주어서 넉넉히 김장까지 담글 수 있었다.
물론 나도 비록 서너 평밖에 안 되는 규모지만 텃밭에서 화초처럼 가꾼 참외와 애호박을 따서 맛보라고 건네주기도 했다. 그러면 그들도 ‘농부도 아닌 사람이 제법이네!’ 하는 표정으로 밝게 웃으며 받아주었다. 어쩌면 한 해 동안 그들과 함께 한 가족처럼 생활을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다.
물론 다소 상품 가치가 떨어지는 것들을 주고받긴 했지만 그래도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것이 직접 파종하고 농약 치는 정도를 보았고 가뭄에 물을 뿌리며 가꾸는 정성과 진한 땀방울을 눈으로 보았기에 안심하고 먹을 수 있어서 그 농부들처럼 흐뭇한 보람이 아닐 수 없었다.
아내 역시 기꺼워하였고 농부들에게 감사인사를 드리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하여 이따금 점심시간에 틈을 내 그들에게 건너가 다과를 건네며 덕담을 나누었는데 그들도 잠시 일손을 멈추고 내 마음처럼 흥겨워했다.
나눈다는 것은 사람과 사람, 그리고 사람과 농작물간의 정겨운 대화요 연대랄까! 이성이나 말 이전의 생존을 위한 원초적 결속인 것 같다.
그런데 예수는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을 하셨고, 석가모니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곧 대가를 바라지 않고 남에게 베푸는 보시를 말씀하셨다. 하지만 말이 쉽지 자신의 손이 모르게,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주기만 한다는 것은 범인에겐 실로 지난한 숙제가 아닐 수 없다.
범인은 그저 주면 받고 싶고 받으면 주지 않고는 못 견디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여 나 역시 그동안 살아오면서 신세를 진 친지나 지인들에게 신세갚음을 하려고 노력을 하는데 늘 누군가 빼놓은 것 같은 허전한 기분이 들곤 한다. 이런 저런 이유 특히 경제적 사정을 핑계로 누군가의 마음의 정을 도외시한 것만 같아 송구하고 미안해서다.
그럴 때마다 <구렁이가 제 몸 추린다.>는 어머니 말씀이 떠올라 변명에 충실한 내 자신이 쑥스럽지만 그래도 아직 다소나마 인간적 정서가 살아있는가 싶어 다행스럽기도 하다.
어떻든 한해가 저물 무렵이면 마음속에 지인들 모습이 떠오르고 떠오른 순서대로 모바일쿠폰이나 귤을 한 상자씩 보내기도 하는데 그것 역시 기실 서귀포에서 귤 농장을 하는 친구 H에게 제주도에 여행갈 때마다 베풀어준 호의에 대한 보답으로 매상을 올려준다는 계산으로 구입하여 보내는 것이다. 그러나 어릴 때 소꿉친구인 L에게는 아무것도 보내질 못하고 있다.
L은 어느 날인가부터 갑자기 연락이 끊겨 지금은 어디에서 사는지, 무엇을 하는지조차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고향의 K사장 같은 친구들은 가끔 전화통화도 하고 얼굴을 봐서 그런가, 언제든 좋은 날 갚겠지 하고 안일한 마음으로 실행을 미루고 있다.
며칠 전, 절친 K가 새해에 즈음해 문자를 보내왔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지갑 먼저 열자는 캠페인을 벌이는 건 어떨까?”
공감이 가고 좋은 의견이다. 어느덧 지천명(知天命)과 이순(耳順)을 지나 종심(從心)이 내일 모래인 터에 그동안 바삐 사느라 보지 못한 친구들을 만나 소주 한 잔 기울이면서 힘들었던 역경과 못 다한 이야기도 나누고 훈훈하게 마음을 나눌 때가 된 것이다.
그런데 내 지갑이 어디에 있던가! 무심코 빈손으로 더듬는 주머니가 허전하다. 문득 아내의 핸드백 속에 들어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아내의 핸드백을 어떻게 열게 할 것인가? 당면 난제가 아닐 수 없다.
새해를 맞아 그 비결 좀 알려달라고 K에게 문자를 넣어봐야겠다.
그전에 먼저 챗(chatgpt)에게 <나눔에 대해> 해법이 담긴 시(詩) 한 편 부탁해본다.
나눔은 작은 빛./어둠 속 길을 비추는 등불./따스한 손길 하나로 세상은 조금 더 밝아진다./나의 것에서 우리의 것으로/작은 마음이 모여/사랑은 끝없이 흐르고/희망은 새싹처럼 자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