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벅터벅 사색(史索) 중] 소현세자

M스토리 입력 2024.12.16 14:54 조회수 901 0 프린트
인조의 앞에 무릎을 꿇은 소현세자. 소현세자의 죽음을 다룬 영화 올빼미의 한 장면.

소현세자는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16세의 나이로 분조를 이끌고 호남으로 내려갔다. 진공하는 물품을 줄이고 항상 백성에게 피해가 돌아가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시종일관 세자의 모습에서는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고, 백성은 그에 따른 감동을 받을 수 있었다. 난리가 끝나고 귀성길에 오르자 그를 환송하는 백성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 산성에 파천했을 때 통곡하는 모습이 두어 번 보였으나, 자신이 감당할 바를 자각한 뒤로는 의연함을잃지 않았다. 병자호란(丙子胡亂) 후 청에 인질로 잡혀간 세자는 어찌 보면 참 우스운 처지였다. 청나라 측에서는 툭하면 외교적 현안들에 대해 세자에게 따져 묻고는 했다. 그때마다 마치 오랫동안 외교 훈련이라도 받은 듯이 능숙하게 대응하고는 했다. 고요한 가운데 당당했다. 실언하거나 표가 나게 감정을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심양의 왕들과 장수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이런 세자를 좋아하게 되었다.

심양에서는 세자빈 강씨와 세자 시간원 관원들, 내관과 시녀들, 봉림대군 부부가 함께 있었다. 이들의 경비는 조선에서 보내온 것과 청이 지원해주는 것으로 충당하다가 나중에는 청에서 자급자족하라며 나눠준 땅을 가지고 조선인 포로들을 모아 농사를 지었다. 여기서 나온 산물을 가지고 무역을 하자, 관소의 문전이 시장과도 같았다. 성리학으로 무장한 시강원 관원들의 눈에는 이런 것이 적잖게 못마땅했겠지만, 세자는 그렇게 심양에서 자기 자리를 잡아나갔고, 조선의 이해를 대변하는 외교관 역할을 훌륭히 수행해 나아갔다.

산성에서 나오기 전, 왕은 어떻게든 출성만은 피하려 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항복 논의가 일기도 전에 이런 말을 했다. 부득이하면 세자를 인질로 보내겠노라고. 어쨌든 결과적으로 출성 항복을 했지만, 심양에 인질로 끌려간 것은 세자와 대군이었다. 볼모 생활 3년 가까이 지난 인조 18년, 청은 세자에게 일시 귀국을 허락했다. 대신 인평대군과 원손을 보내라는 것이었다. 사신으로 갔던 이경헌이 청한 데 따른 것이었는데 화가 난 왕은 이경헌에게 곤장을 쳐서 유배 보내버렸다. 원손 일행은 심양으로 떠나고 세자는 귀국 길에 올랐다. 공식 환영단은 없었지만, 벽제에서 대궐 앞까지 백성이 거리를 가득 메워 눈물로 세자를 맞아주었다. 나라를 망하게 하고,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 원망이야 왕에게로 향했겠지만, 아비의 죄업으로 고생하는 세자에 대해서는 동정이 앞섰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왕은 같이 눈물을 흘려주었다. 

인조 21년 강석기가 죽었다. 세자빈의 아비로 정승을 역임했지만, 축재나 세도를 하지 않아 인망이 높았던 인물, 그해 10월 통사로 온 정명수가 조만간 세자를 돌려보낼 것 같다는 말을 했다. 정명수가 잘못 전했는지, 왕이 잘못 들었는지 영구 귀국으로 받아들여졌던 모양이다. 한편, 심양에서 임시 귀국을 통보받은 세자, 청은 또 원손을 비롯한 세자의 자식들과 교환할 것을 요구했고, 이들 부모와 자식들은 중도에서 잠깐 눈물의 상봉을 해야만 했다. 백성은 또다시 거리를 가득 메워 세자의 귀환을 환영했다. 그런데 세자가 머물렀던 한 달 동안 왕이 세자를 만나보았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인조 13년 중전인 인열왕후가 산실청에서 죽고, 인조 16년 왕은 세자보다 열두 살이나 어린 장렬왕후를 새로 맞아들였다. 참소한 여인이 있었다. 새 중전이 아니라 후궁 조씨. 그녀가 새 중전과 결탁해 세자 부부를 모함했다는 설명이 많은데, 사실이 아니다. 인조는 오직 후궁 조씨만 좋아했다. 인조 23년에는 풍병을 이유로 장렬왕후를 경덕궁에 옮겨버렸다. 후궁 조씨는 심양에 파견되어 있는 내관들, 시녀들과 결탁해 세자 부부를 헐뜯었다. 인조가 친구처럼 여겼던 심기원의 역모 사건도 세자에 대한 경계심을 키워주었다.
 
 

심양에 돌아간 세자는 청의 마지막 대명 총공격에 동행한다. 이때 명은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더니 이 중 이자성이 급격히 세력을 키워 주변을 병합하고 마침내 북경을 접수한다. 승정제의 자살과 함께 명 왕조는 종말을 고했다. 

세자는 동갑내기 청의 도르곤에 의한 북경 함락과 천도, 재건의 과정을 현장에서 지켜보았다. 어느 날 도르곤은 세자와 대군, 용골대 등을 불러 말했다. 북경을 얻기 전까지는 우리 두 나라가 서로 의심해 꺼리는 마음이 있었소, 그러나 지금은 대사가 정해졌으니 서로 믿어야 할 것이오. 세자는 이제 그만 본국으로 아주 돌아가시오. 천하를 얻은 자의 여유가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그리하여 세자 부부는 9년에 걸친 볼모 생활을 청산하고 인조 23년 2월 18일 한양으로 돌아왔다. 

세자는 돌아온 두어 달 뒤 병에 걸렸다. 학질이라는 병명에 왕은 어의 이형익을 시켜 시침하게 하였다. 그러나 사흘 뒤인 4월 26일 창경군 환경당에서 숨을 거두고 만다. 세자의 시신 모든 구멍에서는 검은 피가 흘렀다고 한다. 이형익은 지방에서 번침(침에 불을 달궈 놓는 것)으로 유명해진 뒤 내의원이 추천해 어의가 된 인물. 인조는 그를 신뢰해 10여 년 동안 곁에 두고서 자주 번침을 맞았다. 왕의 수석 주치의였던 셈이다. 소현세자에 대한 왕의 질투심과 의심이 자라 제거해야 할 정적으로까지 발전하였던 것이다. 주도자가 누구인지, 실행자가 누구인지, 왕의 의중이 반영된 일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었다. 

50만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가 노예 시장에서 팔리고 있었고, 포로로 끌려갔다 돌아온 아들은 독살해 버렸던, 조선은 오직‘왕’이라는 한 사람만을 위한 나라였던가.
황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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