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벅터벅 사색(史索) 중] 병자호란(丙子胡亂)

M스토리 입력 2024.12.02 14:21 조회수 703 0 프린트
인조는 후금(청)의 태종(숭덕제)에게 삼배구고두례를 하는 치욕을 당한다.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조선과 형제 관계를 맺고 해마다 일정량의 예물을 상납받고 개시를 통해 어느 정도 교역이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후금의 홍타이지 입장에서 볼 때 정묘년의 원정은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았다. 조선에서 보내온 국서들을 보면 교묘한 말장난과 구구한 핑계들로 가득했던 것이다. 인조 11년, 홍타이지는 조선에서 보내온 예물 수령을 거부한다. 그리고 칸은 조선이 명에 대한 사대와 청에 대한 기망을 꼬집는다. 막 추승을 마친 인조는 정통성을 공고히 하고 나니 갑자기 용기가 치솟은 걸까. 전에 없이 강경한 답장을 보내라 이른다. 전쟁 이후 가장 힘이 강해진 조직 비변사가 반대를 했으나 왕의 갑작스럽게 의연하고 단호한 태도에 대신들은 누구 하나 걱정하면서도 입을 열지 못하였다. 왕은 국서에 임전의 자세를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행히 이때의 긴장은 더 많은 예물을 보내는 것으로 봉합되었지만, 이후로도 이런저런 갈등은 이어져갔다. 

후금은 이즈음 중국 공략을 잠시 멈추고 서쪽과 몽고 정벌에 나서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대부분의 몽고 부족들이 굴복하여 충성을 맹세하여 온 것이다. 인조 14년에 후금의 사신 용골대, 마부대 등이 왔는데, 그 행차가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복속해온 몽고의 왕족들이 함께 따라왔으며 외교 문서도 칸의 글 외에 후금의 집정 대신들의 글과 몽고 왕족들의 글을 함께 가져온 것이다. 내용은 홍타이지를 황제로 옹립하자는 것인데, 조선 조정 안팎은 발칵 뒤집혔다. 앞서 정묘호란 때 형제국의 예로서 황제를 논의하자는 것인데 조선은 예에 어긋난다는 입장을 표하며 극구 거부하였다. 다음날 용골대 등이 돌아가는 길에는 구경꾼들이 가득했고, 심지어 아이들은 돌을 던지기까지 하였다.

인조는 분연히 척화 교서를 반포하였다. 나라 안에는 묘한 통쾌함과 불안감이 교차했지만, 이 모든 것을 배제하고 홍타이지는 황제 즉위식을 가졌다. 소식을 들은 인조는 더욱더 분개하기에 이른다. 인조는 청나라에 보낼 격문에 가까운 글을 짓도록 하였다. 척화는 이제 근본 기치가 되었고, 누구나 이를 당연시 여겼다. 이즈음에는 이상한 일도 많았다. 대동강 오리들이 10여 일에 걸쳐 떼로 싸웠는가 하면, 청파의 돌다리 밑에서는 개구리들이 또한 떼로 싸워 죽은 것이 즐비했다. 그러나 조정은 척화 분위기에 들떠 있기만 했지, 언제나처럼 대비책은 없었다. 목청만 요란한 상황. 이런 분위기에 제동을 건 것은 최명길이었다. 시종일관 강경했던 인조도 꿈에서 깨어났다. 수찬 오달제 등이 최명길을 탄핵하자 왕은 최명길의 충성심을 옹호해준다. 이때 마부대가 의주에 와서 임경업을 만났는데, 임경업이 조선의 격서를 건넸다. 그러나 서찰을 거부하고 사신을 보내달라 요청하게 된다. 강경론에 밀려 몸을 움츠리고 있던 대신들도 조심스레 목소리를 낸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싸울 준비를 하자니 형세가 그렇고 기미할 방책을 세우자니 명사의 무리가 모두 불가하다고 한다. 뒤늦게 방법을 찾느라 우왕좌왕하는데 인조 14년(1636년, 병자년)12월 13일 급보가 전해졌다.
 
 
애초 광해군은 여러 차례 이런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청은 왜적과 다르다. 어찌 꼭 한 성을 함락한 뒤라야 몰려오겠는가. 의주의 성을 비껴두고 곧바로 서울로 들어오면 어찌할 것인가, 중도에서 막을 계책을 마련하라. 그러나 비변사는 별다른 해답을 내놓지 못했다. 청의 팔기군을 대하는 비변사의 전략도 임진왜란 때와 마찬가지로 통념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광해군의 우려대로 성을 놔두고 진격해오면 어찌할 것인가. 그에 대한 나름의 해답이 강화도와 남한산성이었던 것이다. 남한산성에서 버티면 장기전을 우려하여 돌아갈 것이라는 예측을 했던 것이다. 광해군이 주문했던 중도에서 적을 막을 대책은 아예 없었던 것이다. 

정묘년에 적장 아민은 겨우 3만여의 군대만 이끌고 왔다. 때문에 그들은 고립의 위험에 빠지지 않기 위해 중도의 성을 함락해가며 내려왔다. 그만큼 진격 속도도 더뎠고 깊숙이 들어와 장기전을 할 만큼 무모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우선 군병 수만 해도 10만에 이르렀다. 그들은 진군 도중에 있는 성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공격을 하더라도 일부 병력만 떼어내 담당케 하는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진격 속도는 놀라웠다. 6일만에 한양 근처에 도착한 것이다. 인조 일행은 저녁 무렵 출발해 숭례문에 도착했다. 최명길이 적진으로 가 요구 조건 등을 물으며 시간을 끄는 사이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뒤이어 청병도 도착해 산성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12월 16일, 능봉군과 심집이 박난영을 데리고 적진으로 갔다. 오래 포로로 있었던 관계로 안면이 있는 사이였겠지만, 가차없이 목을 베어버린다. 12월 27일, 전날 비변사의 결정에 따라 소 2마리와 돼지 3마리를 잡아 술 10병을 가지고 적진을 찾았다. 이날 충청 감사가 습격을 받아 전멸했다. 12월 29일, 북문 밖에 진을 쳤는데 적이 응하지 않다가 저녁 무렵 돌아오는 길에 기습을 해와 전멸하다시피했다. 해가 바뀌어 인조 15년 1월 1일(1637년), 백관을 거느리고 명나라 황제를 위해 이와중에 망궐례를 행했다. 이날 청 태종도 도착해 진을 치고 현장을 둘러보았다. 1월 25일 청군의 대포 공격에 성벽 곳곳이 허물어졌다. 용골대가 최후통첩을 했다. 대군, 비빈 등이 피신해 있던 강화도가 함락된 것은 1월 22일이었다. 강화 공격을 책임진 이는 구왕이라 불리는 청 태종의 동생 도르곤, 인근의 배들을 징발하고 뗏목을 만들어 타고 오면서 홍이포를 쏘아대니 진을 지키던 조선군은 겁에 질려 대응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마침내 청군이 대거 상륙해 성을 포위해버렸다. 형세를 돌이킬 수 없다고 본 김상용은 문루에 올라 화약에 불을 붙여 자폭했다. 1월 27일 마지막 항복 문서가 보내지고, 1월 30일 인조는 서문을 통해 남한산성을 나섰다. 인조는 청나라식 삼배구고두(세 번 절하고 아홉 번 조아리는)의 예를 올렸다. 그렇게 45일에 걸친 남한산성 농성이 끝이 났다. 포로로 50만여 명을 끌고 가니 청에서는 아시아 최대 노예시장이 열리게 된다.

성리학은 단지 입신양명과 자신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이지 이타적이었던 적이 있었던가. 
황춘식
M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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