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기이륜차 보급 확대를 목표로 한 정부의 국가표준(KS) 정책이 업계의 반발과 우려를 사고 있다. 이미 구축된 전기이륜차 생태계를 뒤흔들고 기존 투자 비용을 무용지물로 만들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일각에서 KS표준 준수 여부에 따라 보조금 지급 차등 등의 주장이 나오면서 업계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국가기술표준원은 2022년 말 전기이륜차용 교환형 배터리 팩, 충전소, 전기이륜차에 대한 KS를 새로 제정했다. 올해는 상호 호환성을 높이기 위해 이를 개정 중이다. 환경부도 올해부터 교환형 배터리 충전시설 보조금을 지급할 때 KS에 적합하지 않으면 지원액의 70%만 지급하는 제도를 시행 중이다.
그러나 정부의 정책에도 불구하고 KS표준을 따르는 제품은 시장에 나오지 않았다. 업계는 이미 제조사별로 배터리와 충전 인프라를 개발하며 상당한 투자가 진행된 상태다. 환경부에 따르면 2023년 7월 기준으로 보조금 지원을 받아 설치된 교환형 배터리 충전소만 1100개소가 넘는다. 이 시설들을 모두 KS표준에 맞게 교체하려면 수백억 원이 소요될 전망이다.
전기이륜차 제조사와 충전소 운영업체는 KS표준을 준수하려면 배터리 팩과 충전 인프라를 새로 개발해야 한다. 그러나 중소기업 비중이 큰 전기이륜차 업계는 이를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한 제조사 관계자는 “이미 설치한 인프라를 폐기하고 새로 개발에 나설 여력이 없다”며 “기존 투자금이 매몰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토로했다.
KS표준이 전기이륜차 성능을 제한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표준화된 배터리의 용량, 전압, 팩 크기 등이 제약을 받으면서 제조사별 기술 개발 여지가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이는 결국 디자인만 조금 다른 유사한 제품만 시장에 출시되어 전반적인 국산 전기이륜차 경쟁력 악화라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정부 정책의 일관성 부족도 혼란을 키운다. 2015년 대만의 ‘고고로(Gogoro)’ 성공 이후 한국에서도 배터리 교환형 전기이륜차를 미래 기술로 선정하고 연구개발에 투자해 왔다. 산업통상자원부의 공모사업을 통해 ‘배터리 교체형 전기이륜차 및 ESS 일체형 배터리 교체 충전스테이션’, ‘배달 업종 대상 전기이륜차 배터리 교환 및 안전 향상 서비스 기술 개발’, 2022년에는 ‘전기이륜차 배터리 공유스테이션 기술개발 및 실증’ 등의 연구 용역이 꾸준히 실시되고 있다. 그러나 상용화에 실패하거나 상용화에 성공해 서비스 중에 있지만 KS표준 보급 확대라는 정부 정책의 변화로 보조금 지원에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또한 KS표준 제정 이후에 발주된 연구 용역마저 KS표준이 아닌 새로운 기술 표준을 검토하고 있어 KS표준의 필요성에 의문을 키우고 있다.
보조금이 시장에서 큰 영향을 미치는 만큼 KS표준을 따르지 않으면 경쟁에서 뒤처질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한 제조사 관계자는 “보조금을 위해 KS를 따를 수밖에 없지만, 기존 제품은 어떻게 할지 막막하다”며 “정부가 새 제품 개발과 인증 비용을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KS표준이 시행된 지 1년이 지났지만 상용 제품 출시가 전무하다는 점은 정부 정책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상호 호환성을 확보하고 전기이륜차 보급을 확대하겠다는 목표와 달리 오히려 전기이륜차 시장의 발전을 저해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현실적인 지원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시장의 현실을 무시하고 정부가 KS표준을 사실상 강요하는 방식이 아니라 기존 인프라와 기술을 존중하며 표준화를 유도하는 방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전기이륜차 보급 확대와 산업 생태계 성장은 정부와 업계의 협력 없이는 불가능하다. KS표준은 중요한 과제이지만, 이를 성급히 강제하기보다 점진적이고 포용적인 방식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정부의 정책이 산업계를 살리는 방향으로 수정되기를 기대하는 업계의 시선이 무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