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수 시인의 문화 산책] 낙엽을 쓸며

M스토리 입력 2024.11.15 16:23 조회수 726 0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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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비가 내린 다음 날 아침 날씨가 맑아졌다. 하늘은 푸르고 구름도 더없이 희고 선명하다. 하지만 바람이 선선해져서 아파트로 다시 들어가 가을 점퍼를 꺼내 입고 출근을 해야 했다.

사무실 마당에는 배나무와 벚나무, 단풍나무 낙엽이 떨어져 바람에 뒹굴고 있었다. 낙엽들도 나뭇가지에서 떨어져 마당으로 출근한 것 같았다. 날렵한 날개가 출근복인 낙엽은 색(色)이 곱고 화사하다. 몇 주 전에는 50년 만에 찾아온 기나긴 폭염과 열대야에 시달려 누렇게 뜬 고엽(枯葉)이 떨어졌었는데 오늘은 밝은 오방색이다.
나는 사무실 바닥청소를 하고 여름내 창문에 덕지덕지 낀 먼지를 물티슈로 닦아낸 다음 마당으로 나와 빗자루로 낙엽을 쓸었다.

나는 긴 대빗자루로 낙엽 쓰는 것을 좋아한다. 마당이 좁았던 시골집과 아파트에서만 살아서 그런지 마당 넓은 집이 부러웠다. 하여 마당 넓은 집에 놀러 가기라도 하면 짐짓 빗자루를 들고 마당을 쓸어보곤 했었다.  
오늘도 그런 기분으로 마당을 쓸었다. 쓸다보니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고 머릿속 잡념도 쓸어내는 것 같았다. 마치 명상하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뒤돌아보니 마당에는 아직 쓸리지 않은 잡념이 남아있는 게 아닌가. 추억이란 이름의 아련한 풍경들이다.

코스모스와 들국화가 핀 시골길을 걷던 날의 풍경과 가을운동회 날 푸른 하늘 아래 펄럭이던 만국기가 먼저 연상되었다. 그리고 누군가와 호숫가를 걸었던 기억과 소란스럽게 동네 뒷산에서 지저귀던 산새소리와 풀벌레의 합창소리가 방금 들은 참새 떼 소리처럼 귓가에 쟁쟁하다.

마당을 다 쓸고 사무실로 들어와 커피원두를 믹서로 갈았다. 지난해 큰 처제가 볼리비아 의료봉사를 다녀오면서 보내준 커피원두다.

커피를 내려 한 모금 마시며 낙엽을 쓸어낸 마당을 창문으로 내다보았다. 깔끔하고 개운한 느낌이 든다. 커피 맛도 낙엽 냄새가 나는 듯 향기롭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보니 어느 여자가 이효석의 ‘낙엽을 태우며’ 수필을 읽었던 여고시절의 추억을 되살려 민박집 주변에 나뒹구는 낙엽을 긁어모아 태워봤다고 한다. 그리고 이효석처럼 갓 볶은 커피 향을 느껴보려 후각을 열었으나 그 향을 느끼지 못해 실망했다는 것이다.

그녀의 후각과 소설가의 후각이 달랐던 것일까? 아닐 것이다. 낙엽이 여러 종류가 있듯이 타는 냄새도 각기 다를 것이기에 그녀가 이효석과 똑같은 낙엽을 태웠더라면 아마 갓 볶은 커피 냄새를 공감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싶다.

한편 나 역시 그녀와 비슷한 시기에 이효석의 수필을 읽고 ‘낙엽을 밟으며’란 수필을 써서 학교교지에 실었던 기억이 있다. 그랬다. 소설가가 낙엽을 태우며 낙엽에게서 받은 느낌처럼 나는 나름대로 낙엽을 밟으며 어떤 정신적 즐거움을 맛보려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그 행위는 실로 잔혹한 치기가 아닐 수 없다. 낙엽이 내게 밟혀서 갈라지고 부서지며 쏟아냈을 처절한 절규를 즐기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하여 낙엽의 복수랄까, 비약인지 몰라도 내가 맛본 즐거움만큼 낙엽은 가을이면 내게 다가와 부모님 사별 이래 친한 친구나 지인들과 계속 사별하는 것에 대한 이별의 아픔을 통렬하게 느끼게 하는 것만 같다.

시몬. 나뭇잎이 저버린 숲으로 가자 (중략)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중략)
낙엽은 날개 소리, 여자의 옷자락 소리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오라 우리도 언젠가 낙엽이 되리라 (후략)

프랑스의 시인 ‘레미 구르몽’의 ‘낙엽’이란 낯익은 시(詩)다.

그렇다. 낙엽을 밟은 우리는 죽어서 나무 아래 묻혀 낙엽이 되고 그래서 자신이 밟은 낙엽처럼 누군가에게 밟히는 운명이 될 런지도 모른다. 마치 원형이정(元亨利貞)의 원리에 따라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삶을 윤회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차라리 나는 숲이 아닌 우리 마을길의 은행나무 잎이 되고 싶다. 은행나무 잎이 바람에 흩날리는 그 길은 실로 환상적이기 때문이다. 은행잎이 깔린 길을 걸으면 마치 황금빛주단을 밟는 우아한 느낌이 들고 그 느낌은 부득이 헤어져 떠나는 모든 존재들을 격려하는 갈채 같기에 하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라고 한용운님이 ‘님의 침묵’에서 밝혀주었듯이, 이별은 황금빛갈채를 받으며 가을에 떠났다가 봄이면 진달래 연분홍빛으로 다시 만나는 필연적 한 여정(旅程)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런가, 가을이 되면 헤어진 사람이 애틋하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하여 그 모습을 추억하고 또 함께 걸었던 현장을 다시 걸어보곤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피천득이 수필 ‘인연’에서 아사코를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라고 회고한 것처럼 만나지 않는 것이 만나는 것보다 오히려 더 아름다울 수도 있겠다.

낙엽을 바라보며 나 역시 헤어진 사람들을 정겹게 추억해본다.

김**, 윤**, 정** …?

이제는 거처와 안부도 모르고 전화번호도 모르지만 그저 그리울 뿐인 사람들이다.

사무실 마당에는 다시 낙엽이 쌓이고 있었다. 바람이 그것들을 내 대신 울타리 밖으로 쓸어냈고 창문도 흔들어 그리운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잘 자고, 잘 먹고, 차 조심하고...>

어머니의 잔소리처럼 아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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