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로나에 걸려 추석 연휴에 처가에 가지 못했다. 아들이 대신 다녀왔다. 차례도 못 지내고 어머니 영가를 모신 소사 영묘각에도 가지 못했다. 딸과 사위도 다니러 오지 마라 당부했다. 친구들 모임에도 나가지 못해 간곡하게 핸드폰으로 불참하는 저간의 사정을 설명해야 했다.
핸드폰이 이 시대 소통의 아이콘이 된지 오래다. 유아원에 다니는 어린아이에서부터 경로당 노인에 이르기까지 전 국민이 핸드폰을 다 갖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느 노인이 핸드폰을 잃어버렸다가 찾고서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마누라는 잃어버려도 이 놈은 안 돼.”하고.
소통을 하기 위해 말을 전달하는 도구인 핸드폰이 필수가 된 세상이다.
하지만 ‘말’이 차지하는 비중이 7%밖에 유효하지 않다는 연구결과가 있고 보면 말의 도구인 핸드폰도 소통상 매우 불완전한 도구라 할 것이다. 93%는 비언어적 내용으로 눈빛이라든가 몸짓 또는 주변 환경에 의해 전달되는 것이라 한다. 영상통화가 있긴 하지만 습관이 안 돼 어색하고 이용하기가 쉽지 않다. 여하튼 핸드폰으로는 언제 어느 때 누구하고나 통화를 할 수 있지만 통화하고도 아쉬움이 남는다. 하여 몇몇 여자들은 핸드폰으로 몇 시간씩 통화를 하고서 “남은 이야기는 내일 만나서 하자.”고 다시 약속을 하는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대면하는 소통이라 하더라도 진정 어려운 것은 세대 간의 대화일 것 같다.
가령 내일이 기말고사 치는 날인데 아들이 정신없이 컴퓨터 게임에 몰두하고 있다고 하자. 어떻게 아들의 게임을 중단시키고 공부에 열중하게 할 수 있게 할 것인가?
요즘 대부분의 엄마아빠들이 겪는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다.
이 경우 무작정 아들 방으로 뛰어 들어가 손바닥으로 뒤통수를 후려칠 것인가 아니면 어떤 적당한 말로 설득할 것인가 판단이 쉽지 않다.
부드러운 말로 주의를 주어도 충분한 아들이 있을 것이고 게임에 동참하여 설득해야 할 경우도 있을 것이다. 어떻든 어떤 방법이든 모색하고 선택해야한다.
사춘기 시절 우리 아들의 경우는 부드러운 말로 해야 했다.
“아들, 방에 들어가도 되냐?”
“아니요.”
“게임이 좀 긴 것 같지 않니?”
“예, 알아요.”
그리고 말이 없다. 나는 방 밖에서 기다린다. 그러면 잠시 후 컴퓨터 끄는 소리가 들린다. 다행이다. 만약 심한 말로 지적하고 물리적으로 통제하려했다면 신경질적으로 반발하거나 말다툼을 했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아들의 감정이 심히 상할 것이고 머릿속에는 게임의 잔상이 남아 공부가 제대로 될 리 없었을 것이다. 다음날 시험 결과는 빤한 노릇.
어느 정신과의사는 아들의 방에 들어가 직접 게임에 동참하여 설득을 한다고 했다.
먼저 아들이 게임이 얼마나 재미있으면 내일이 시험인데도 저렇게 열심히 게임을 할까! 하고 자신이 먼저 아들의 심리상태를 이해하고 말을 건다.
“아들, 그렇게 재미있어? 무슨 게임인데?”
“스타크레프트요.”
“아, 그렇구나. 요즘 유행하는 게임이구나. 그런데 전세가 어때?”
그러면 아들이 정신없이 게임에 몰두하다가도 신이 나서 전세를 설명한다. 설명을 하다 문득, 아빠의 눈치를 살피고
“이제 그만할게요.” 한다.
“아, 그래. 미안하다. 아빠가 게임을 방해했나봐?”
“아니에요. 혼자 하는 싱글플레이 게임이라 나중에 다시 하면 돼요.”
“그래, 그럼 그렇게 해. 나 나간다.”
시험에 대한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들이 스스로 인지하게끔 한 것이다.
그런가하면 소통은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방식이 달라지게 마련이다.
나의 경우 소통의 상대가 아내일 경우에는 대부분 기준점 차이 때문에 빚어지곤 한다.
일요일에 딸아이와 전화통화를 했는데 다음 주 토요일에 다니러 오겠다고 했다. 사위 생일이 그날이라 함께 점심을 하자는 것이었다.
내가 아내에게 “‘다음 주 토요일’ 오겠다는데.” 하고 전언을 하자 아내가 “‘이번 주’에요.” 한다.
나는 한 주일의 시작을 월요일로 생각하고 말한 것이고, 아내는 달력에 인쇄된 대로 일요일이 한 주일의 시작이라 그렇게 말을 한 것이다.
사실 생일이 이번 주 토요일이면 어떻고 다음 주 토요일이면 어떤가! 날짜만 같으면 그만인 것을... 그런데 잠깐 나는 큰 목소리로 아내를 설득하려 했고 아내는 품위 있게 나직한 목소리로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만약 이때 아내나 나나 감정적으로 자기주장을 더 고집하고 대거리를 했다면 하루가 괴로웠을 것이고 건강에도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여간 가족적으로 혼란스럽지 않게 정리해둘 필요가 있을 것 같아 나는 아내가 말한 대로 ‘이번 주 토요일’로 말을 바꾸기로 했다.
“그래, 이번 주 토요일에 오겠다니, 뭘 준비해야하나?”
어디선가 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반갑다. 가을이라 귀뚜라미가 우는 것인지 귀뚜라미가 울어서 가을인지는 몰라도 언제 들어도 정겹다. 귀뚜라미 소리를 통해 비로소 가을과 소통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