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벅터벅 사색(史索) 중] 임진왜란 - 4 - 정유재란(丁酉再亂)

입력 2024.09.13 14:28 조회수 974 0 프린트
사진은 경남 거제시에 위치한 칠천량해전공원.

진주성 학살극을 벌인 일본군은 왜성으로 들어갔고, 명나라 측은 이를 문제 삼지 않은 채 강화논의를 계속했다. 협상의 두 주역인 명나라의 심유경과 일본의 고니시는 죽이 잘 맞았다. 둘 다 배포가 컸고, 언변이 뛰어났으며, 협상가들답게 정세에 대한 판단이 매우 현실적이었다. 명나라의 강화 조건은 “관백이 항복하고, 조선에서 즉시 철군하며, 조선을 영구히 침략하지 않는다.”는 것에 반하여 일본은 “명나라와 화평의 의미로 황녀를 일본 왕의 후궁으로 보내고 조선 8도 중 4도는 일본이 차지하며, 조선의 왕자를 인질로 보낼 것” 등을 요구했다. 입장 차이로 인하여 강화는 불가능이라 여겼으나 양측의 강화는 기정사실이 된 상황이었다.

일본 측이 성의 표시로 임해군과 순화군을 방면했고, 명나라 군대는 1만여 명만 남기고 철수했다. 협상 의지는 명나라 측이 오히려 컸다. 일본 측은 철군을 미룬 채 여러 왜성에 주둔하고 있었지만, 명나라 측은 자기 조정에 일본군이 서생포에만 약간의 군대를 남겨놓고 철수했다고 보고하였다. 

심유경과 고니시는 고민 끝에 기상천외한 대사기극을 공모한다. 선조 27년 12월 고니시는 가짜 항복문서를 든 사절단을 명으로 보냈고, 명은 받아들여 이종성, 양방형을 책봉사로 파견하기에 이른다. 이에 자신이 내건 조건이 관철된 것으로 착각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순차적으로 철군령을 명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사신이 왕자를 인질로 데려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만나주지 않았고 명나라 사신은 기쁘게 맞았다. 책봉은 황제가 내려주는 것이므로 책봉을 받는 자는 칙서와 책봉사에 대해 최상의 예를 갖추어야 한다. 그런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뻣뻣하게 앉아 있었다. 마치 모든 것에 승자가 된 듯이. 책봉사는 당황했다. 사정을 아는 심유경은 관백이 무릎에 종기가 났다고 둘러대어 간신히 책봉례를 마칠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튿날 축하연에서 심유경과 고니시의 사기극은 파국을 맞는다. 명나라 황제가 관백을 일본왕에 책봉한다는 서신을 읽게 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대노하자 명나라와 조선의 사신들은 도망치듯 일본을 떠났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다시 전쟁의 명을 내리게 된다.

조선 수군 격퇴, 호남 점령이라는 양대 과제를 떠안은 일본 장수들에게 이순신 제거는 공동의 목표였다. 이순신은 선조 26년, 한산도로 수영을 옮기고 3군 수군통제사에 제수되었다. 당시 일본군은 해안과 섬들 곳곳에 왜성을 쌓고 주둔하고 있었다. 싸움을 청해도 적들이 성에 웅거한 채 나오려 하지 않으니 이순신으로서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일본군도 이순신도 선제공격을 하지 못하는 팽팽한 힘의 균형이 유지되고 있었다. 강화 논의가 지루하게 계속되면서 조선군 내부에서도 독자적으로 적을 치자는 목소리가 커져갔다. 

원균은 이순신이 수군통제사라는 직함으로 직속 상관이 된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면전에서 노골적으로 불평을 늘어놓고, 여기저기에 이순신에 대한 험담을 하고 다녔다. 둘 사이의 불화는 어느덧 조정의 중대 현안이 되었다. 사람을 보내 둘의 화합을 권고했는데도 갈등이 계속되자 조정은 원균을 경상 우수사에서 해임하고 충청 병사로 옮겼다. 육지로 올라온 원균은 불쾌했지만, 새로운 환경을 십분 활용한다. 조정의 대신들에게 적극적으로 로비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영향으로 선조는 작심한 듯이 이순신을 폄하하고 원균을 높이는 발언을 시작한다. 왕이 일관되게 원균을 추켜세우고 이순신을 폄하하는 태도를 보이자, 신하들도 왕의 견해에 부화뇌동하는 경향을 보인다.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이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는 울산왜성을 공격하는 모습을 담은 그림
고니시와 선을 갖고 접촉해온 김응서의 장계가 도착한 것은 바로 이때였다. 고니시와 가토는 이웃한 영주였지만 서로 앙숙이었다. 둘은 서로를 라이벌로 여겼고, 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경쟁하듯 둘에게 제1, 제2 선봉장을 맡겼다. 고니시는 자신과 가토의 불화를 이순신 제거에 이용하기로 하고 이에 조선 조정은 그의 계략에 걸려들고 만다. 가덕도로 나가 가토를 잡으라는 명에 이순신은 이를 적들의 흉계로 보고 명을 거절한다. 그리고 이때를 맞춰 약속이라도 한 듯이 원균은 장계를 올려 본인에게 맡겨줄 것을 청한다. 가뜩이나 이순신에 대한 근거 없는 불신으로 가득했던 조정은 이제 이순신 제거를 하기 위해 저마다 경쟁하듯 뛰어든다. 심지어 이순신을 추천 한 유성룡까지 모함 경쟁에 가세를 하기에 이른다. 사헌부가 적극 가세하면서 체포령이 떨어졌다. 체포된 이순신은 다행이도 정탁이 나서서 간하여 고문은 한 번으로 끝나고 삭탈관직 되어 백의종군 길에 나선다.

이즈음 조선 육군은 유명무실한 상태로, 믿을 데라고는 오직 수군뿐이었다. 수군이 강한 것만 알았지, 왜 강한지는 전혀 모르는 조정이었다. 새 수군통제사 원균은 진중에서나 전투에서나 이순신과는 반대로 행동했다. 이순신은 늘 부하들과 함께하고 수시로 불러 작전을 의논하고 술을 마시며 바둑을 두고 소통하였다. 그래서 이순신 휘하 장수들은 대장의 생각과 작전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고, 이로부터 환상의 조직력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원균은 이순신이 신임했던 장수들을 멀리했고, 운주당에 첩을 데려와 살았다. 부하들은 원균의 얼굴조차 보기 힘든 처지였다. 

강력한 수군이 출전만 하면 뭔가 될 거라는 환상에 젖은 조정은 새 통제사 원균에게 가덕도로 나가 싸우기를 요구했다. 이는 원균 자신의 주장이기도 했으나 휘하 장수들이 결사반대인 데다 원균 자신도 이 작전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깨닫게 되면서 입장을 바꾼다. 육군도 조정도 수군만 나서면 길이 열릴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때인지라 도원수 권율이 촉구하고 선조도 거든다. 그래도 망설이자 권율은 원균을 불러다 곤장을 쳤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출정을 명한다. 그동안 만들어놓은 전선까지 총동원된 최대 규모의 출전이었다. 

이순신은 사전에 충분히 정보를 취합하여 작전을 세우고, 언제나 척후선을 띄워 적의 동향을 시시각각으로 확인했다. 노 젓는 병사들이 지치지 않도록 중간 중간 정박하여 휴식을 취하게 했으며 일단 싸움이 시작되면 속전속결로 끝내고, 싸움이 끝나면 안전한 곳으로 이동해 정박했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놓지 않았던 것은 싸움의 주도권이었다. 

원균은 척후선도, 사전 정보도 없이 대규모 선단을 출동시켜 강행군을 거듭했다. 적선 몇 척이 보이면 유인선인지도 모르고 전력을 다해서 쫓곤 했다. 지칠 대로 지친 조선 수군이 7월 16일 새벽 칠천량에 정박했다. 목마른 병사들이 서둘러 상륙해 물을 찾는데 1,000여 척의 적군이 포위해왔다. 거북선과 판옥선 160여 척이 손실되었고 병졸 1만여 명이 숨졌다. 이억기는 전사했고, 원균은 육지로 도망하다 죽음을 맞이했다. 일본군이 유일하게 두려워했던 막강 조선 수군은 그렇게 칠천량 바다를 밝히며 사라지고 말았다. 
 
“누구나 다른 사람이 하는 일은 쉬워 보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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