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벅터벅 사색(史索) 중] 임진왜란 - 2 - 파죽지세(破竹之勢)

M스토리 입력 2024.08.19 13:53 조회수 1,927 0 프린트
충주 탄금대 신립장군과 팔천고혼위령탑

조선은 문(文)이 우위의 나라이다. 조선을 건국한 사대부들은 문에 대한 지배를 제도화하는데 성공했다.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만큼 조선은 그 어느 나라보다 세련된 문치(文治)를 이룩했다. 그러나 문 중심의 사회는 필연적으로 무에 대한 경시를 가져오게 마련이다. 건국 초기에는 그래도 무의 중요성이 대두되면서 진법 훈련이나 무기 개량 및 발명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평화가 200여년간 지속되면서 무는 점차 관심 밖으로 사라졌다. 이런 경향은 사림(士林)이 집권하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병법을 하나도 모르는 문신들이 비변사 재상, 병조 판서, 도원수까지 모든 요직을 차지했다. 더욱이 그들은 좋은 장수를 육성하기 위한 제도도 좋은 장수를 보는 안목조차도 전혀 없었다. 장수들도 해이해지기는 마찬가지여서 과거에 급제하면 그뿐 스스로를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는 않았다. 변방에 배속되면 다른 무엇보다도 본인의 축재(蓄財)에 열성을 올리는 그들이었다. 일선 병사들은 양민 중에서도 가장 약한 처지의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이 위험한 삼위일체에, 전쟁은 없다는 동인 권력의 상황 판단까지 더해졌으니. 무를 모르는 문신 위주의 수장들, 변방에서는 축재에 연속, 오합지졸의 병사들은 그야말로 환상의 조합이었다.

선조 25년 1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침략을 결정짓고 총동원령을 내린다. 이에 따라 수십만 대군이 나고야로 집결하고 이 정보는 사신을 통해 조선에 전해졌다. 그런데도 일말의 경계조차도 하지 않은 일선의 장수들이었다.

임진년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1만 8,700명의 침략군 선봉대가 부산 앞바다에 나타나고 나서야 침략 사실을 알았다. 당연히 일본의 상륙을 막기 위한 해전 한 번 없었다. 일본 침략군과 처음 대적한 곳은 정발이 첨사로 있는 부산진성. 압도적 숫자와 전투 능력, 장비를 갖춘 적에 맞서서 정말 이하 군민들은 잘 싸웠다. 그러나 성은 끝내 함락되고 적들은 성 안의 조선인 3,000여 명을 살육한 뒤 동래읍성으로 향했다. 동래 부사 송상현과 동래성 군민들도 끝까지 싸웠으나 반나절 만에 함락되었다. 고니시는 동래성에서도 수천의 군민들을 도륙했다. 조선의 매운맛은 여기까지였다.
 
경상좌병사 이각은 동래성에 들어왔다가 도로 나가 밖에다 진을 친 다음 전투가 시작되자 도망쳐 버렸다. 경상좌수사 박홍은 성과 무기를 버리고 도망갔고, 경상우수사 원균은 무기와 배를 바다 속에 밀어넣고 도망쳤다. 수장이 도망가버리니 이하 군대 또한 흩어져버렸다. 

반면, 일본 군대는 어떠한가? 사령관들은 각 지방의 영주들이고 휘하 군대는 그 지방 출신으로 편성되어 있어 결단력이 강했다. 이미 여러 전투에서 손발을 맞췄기 때문에 조직력 있는 정예 부대였다. 최신식 조총으로 무장하고 미리 첩자를 통해 조선 전역을 샅샅이 조사한 바 조선 사정에 대해 매우 정통했다. 싸움에 임해서는 먼저 척후를 보내 충분히 정보를 확보하고 그에 기초에 전술을 짜고 움직였다. 지피지기한 최정예 일본군과, 적도 나도 누군지 모르는 오합지졸 조선군과의 싸움이었다. 

고니시의 제1군에 이어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가 이끄는 2만 2,800명의 제2군, 구로다 나가마사가 이끄는 1만 1,000명의 제3군이 4월 18일, 19일 차례로 부산에 상륙했다. 그렇게 5만여 명의 선봉군은 세 갈래로 나뉘어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북상을 계속했다. 

일본의 침략 소식은 나흘 뒤인 4월 17일 조정에 전해졌다. 연이어 도착하는 보고들을 통해 사태의 윤곽은 잡을 수가 있었다. 당시 조선의 방어체계는 제승방략(制勝方略)이라 했다. 이 방식은 각 고을의 군사가 약속한 장소에 모여 대군을 이루고는 중앙에서 보낸 장수의 지휘를 받도록 한 것이었다. 경상 감사 김수는 이 전략에 따라 대구 들판에서 각 고을의 군대를 모아 진을 치게 했다. 지휘 체계도 안 잡힌 오합지졸의 군대는 하나둘 흩어지기 시작해 순변사 이일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거의 와해된 뒤였다. 가까스로 수습하여 남은 군사를 모으고 상주 냇가에 진을 쳤는데 적이 왔다는 보고가 들어왔으나 이를 무시하고 섬멸되었다. 

신립은 당대 최고의 명장 여진족 이탕개의 침입을 물리친 영웅으로 기병에 능한 적을 기병으로 맞서 번번이 제압한 것으로 더욱 유명했다. 여진족에게 그의 이름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기병에 자신 있던 신립은 천하의 요새인 조령을 떠나 충주 탄금대 강을 등지고 배수의 진을 쳤다. 그러나 평야라지만 논밭이 많아 말이 달리기가 곤란한 지대, 이윽고 적이 포위해 들어왔다. 장애물도 없는 평지, 논밭에 빠지며 기동성도 사라진 기마 병단은 일본군 조총부대에게 아주 쉬운 과녁이 되고 말았다. 일본 조총부대는 오다 노부나가를 시작으로 3열 앉아 총을 쏘는 기단총식 연습을 이미 30여년에 걸쳐 마치고 정예화된 부대였다. 그렇게 힘 한번 써보지도 못하고 조선이 자랑하던 신립의 부대는 속수무책으로 깨져나갔다. 신립은 강물에 몸을 던졌다.

조선군의 핵심 역량이 여지없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보고받은 선조는 파천을 결정한다. 파천 반대를 부르짖던 신하도, 궁궐 호위를 맡은 갑사도 거의 달아나버린 상태여서 호종하는 종친, 문무관이 100여명도 안 되는 초라한 피란 행렬에 오르게 되었다. 이날 저녁에 간신히 임진강을 건넌 왕은 “나루를 끊고 배들은 모두 가라 앉혀라. 그리고 뗏목을 만들지 못하게 가까운 곳의 인가(人家)는 모두 철거하라”라는 명을 내렸다. 왕이 떠난 궁궐은 백성의 습격을 받았다. 분노한 백성이 궁궐을 불질러 버렸다. <실록>의 사초 및 <승정원 일기>, 노비문서 등 모든 기록물들이 불타 버렸다.

그렇게 원균과 선조는 똑같은 모습으로 저만 살자고 모두를 버린 채 도망쳐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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