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수 시인의 문화 산책] 주먹호박의 여름

M스토리 입력 2024.07.31 14:59 조회수 2,125 0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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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에어컨과 선풍기가 바쁘다. 무더위를 식히느라 숲은 어제보다 더 우거졌고 텃밭에 채소는 눈부시게 무럭무럭 자라났다. 우리에게 견디기 힘든 장마가 그들에게는 절호의 기회인 것 같다.

그 가운데 호박에 유난히 눈길이 간다. 다른 집에 비해 보름가량 늦게 심었지만 어느새 꽃을 피우고 넝쿨이 주변의 잡풀과 나무들을 뒤덮기 시작했다. 올해에도 호박이 많이 열릴 것 같은 예감이 든다.

호박꽃을 볼 때면 괜히 미소가 떠오른다. 문득 ‘박호순’이란 별칭이 생각나서다. 그 별칭을 거꾸로 읽으면 ‘순호박’. 한때 못나고 뚱뚱하고 세련되지 못한 추녀를 지칭했던 말이다. 요즘은 ‘뚱녀’니 ‘안여돼’니 ‘폭탄’이니 하는 말로 대체되었다는데, 왠지 건조하고 폭력적 느낌이 든다.

마음을 순화시키는 기분으로 챗 GPT에게 호박꽃을 소재로 ‘사랑의 시’를 요청했더니 눈 깜빡할 사이에 한 수 지어준다.

향기는 달콤하게 퍼지고/그 모습 우아하게 펼쳐지네
사랑은 그렇게 호박꽃처럼, 부드럽고 강인한 존재여야 하리

어둠이 지나면 눈앞에 피어나는/영원히 지속될/약속의 꽃
너의 품위와 고귀함 늘 환히 빛나리라

고요하게/텅 빈 마음에 떠올라/우리가 함께하는 모든 날, 달콤하게 울리는
금빛 종소리/들어봐

이 시는 호박꽃에 얽힌 전설과 맥을 같이 하는 것 같다.

옛날 종을 만들던 할아버지가 죽었는데 옥황상제 앞에 가서도 자꾸 뒤를 돌아다보자 옥황상제가 그 연유를 물었다. 하여 할아버지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종소리를 들려주려고 종을 만들고 있었는데 저승사자가 나타나 그만 완성하지 못하고 왔노라고 했다. 그러자 옥황상제는 “그럼 다시 가서 종을 완성하고 오라.”고 명하여 할아버지는 부지런히 종을 만들던 곳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승의 시간은 이미 200년이나 흘러버려 만들던 종은 가뭇없이 사라져버리고 그 터에 금종모양의 꽃이 피어있더라는 전설이다.

그런가하면 신데렐라가 왕자를 만나러 갈 때 요정이 호박으로 만들어준 황금마차를 타고 간 것처럼 우리 어머니의 팔촌 오라버니 그러니까 나에겐 구촌 아저씨네 넷째 딸 순이 누나 이야기도 생각난다.

그 누나는 호박처럼 둥글고 호박꽃처럼 정겹게 생긴 여자다. 그렇지만 늘 알랑드롱 같은 미남자를 만나고 싶다고 소망했다. 그런데 정말 소원처럼 그 누나는 그런 미남자를 만났고 음식 솜씨가 좋아 그 남자와 함께 C시에서 전통 막국수집을 운영하여 제법 많은 돈을 벌었다. 하여 부부동반 해외여행을 여기저기 다니더니 환갑 때는 멀리 유럽에까지 두루 다녀왔다. 하지만 누가 ‘살만하면 죽는다’라고 했던가. 유럽여행을 다녀온 이듬해 그만 그 남자가 애석하게도 심장마비로 운명을 달리했던 것이다.

하여 그 누나는 한동안 음식점 문을 닫고 가눌 수 없는 슬픔으로 괴로워했다. 하지만 이내 곧 기운을 차리고 신장개업한다며 다시 막국수집 문을 열었는데, 그 남자를 쏙 빼닮은 아들과 함께였다.
오늘도 그 순이 누나를 생각하게 만든 호박꽃이 텃밭 가득 화사하다.

<주먹호박>도 꽃을 피웠고 다른 것들보다 먼저 큼직하게 호박을 열었다. 호박품종에 주먹호박이란 이름은 없지만 작년 가을에 내 주먹 크기만 한 호박을 하나 얻었기에 내가 붙여준 이름이다.

흥부전에서처럼 어느 제비가 씨를 물어다 던졌는지 지난해 봄, 텃밭 인근에 은밀히 싹을 낸 녀석이다. 이미 맷돌호박을 여러 포기 심었기에 파서 멀리 던져버렸던 것인데 녀석이 그 험지에서도 악착같이 줄기를 뻗고 뜨거운 여름도 견뎌내고 기어이 가을에 풀숲 안에다 주먹만 한 호박을 하나 남겨놓았던 것이다. 만져보니 여간 단단한 게 아니다. 다른 호박들은 상당수가 호박파리 피해를 입어 망가졌건만 이렇게 말짱하다니! 놀라웠다. 마치 ‘나 여기 살아 있소’하고 나를 향해 불끈 주먹을 쥐어 보이는 것만 같았다. 가꾸질 않아 잡초 속에서 꽃도 피우지 못하고 독야청청 살다가 말라죽었거니 했는데… 여하튼 다른 호박들과 함께 그늘에 보관해두었다가 겨울에 호박고지를 만들기 위해 쪼개보니 속이 금빛이고 냄새도 향기로웠다. 더 놀라운 것은, 수저로 속을 긁어보니 씨앗이 딱 한 개만 들어있는 것이 아닌가. 세상에나! 다른 호박들은 수십 개, 수 백 개 씩 씨를 쏟아내건만, 단 한 개라니…

하지만 그 호박씨가 싹을 내어 무성하게 줄기를 뻗고 호박을 연 것을 보니 감개가 무량하다.

문득 영화 닥터지바고의 등장인물 ‘토냐’가 연상된다.

제2차 세계 대전과 러시아혁명의 혼란 속에서 유리 지바고와 라라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그러나 어떻게 성장했는지 알 수 없는 토냐. 하지만 비슷한 처지의 남친 다비트와 함께 노동자로 굳세게 살아가는 여인 토냐.

그녀는 동생 유리 지바고의 딸을 찾던 이복형 예브그라프 지바고가 “아버지를 기억하냐?”고 물었을 때 “노”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이어서 “발랄라라이카를 칠 줄 아냐?”는 물음에는 “예술가처럼 쳐요.”라고 남친 다비트가 대신 대답해준다.

“예술가라, 그럼 타고난 거군.”하고 들려주는 예브그라프의 독백과 유리 지바고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과 똑같은 악기 발라라이카를 등에 메고 힘차게 어디론가 떠나가는 뒷모습을 비춰주며 영화는 그녀가 유리 지바고와 라라의 딸임을 암시한다.

이른 아침부터 흰나비 두 마리가 주먹호박꽃 주위에서 다정하게 날고 있다.

토냐처럼 강인하게 전설의 종처럼 은은하게 감동의 금빛 꽃을 피운 주먹호박의 푸른 줄기를 다시 바라보며 올해에는 실하게 많은 씨앗 맺기를 기원한다.
M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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