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은 천성이 어질고 유학의 가르침에 충실한 사람으로 세자 시절에 동궁에 있는 옥대와 수정단주를 잃어버린 일이 있었다. 내시가 사건을 키워 진상을 밝히려 하자 인종은 괜한 사람들이 다칠 것을 염려해 “이런 보물들은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다가 결국에는 가야 할 데로 돌아갈 것이니 다시 보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고 후에 과연 몇 사람의 손을 거쳐 다시 궁중에 들어왔다고 한다. 역추적을 해보니 동궁을 수리하던 한 일꾼의 소행으로 드러났다. 복성군의 어린 딸과 두 여동생을 사면해 달라는 애절한 상소를 올렸는가 하면, 동궁에 불이 났을 때는 남을 원망하기보다 자신을 책하는 글을 지었다. 호시탐탐 자신의 자리를 노리는 계모 문정왕후를 지극한 효성으로 대했고, 나이로는 아들뻘인 이복동생 경원대군을 우애로 대했다. 새 임금 인종의 좌우에는 명망 있는 대신들이 포진했고, 사림의 맥을 잇는 신진들이 언관의 중심 세력을 형성했다. 인종은 자신을 해하려 했던 소윤에 대해서도 보복을 피하고 다독거려 안심시켰다.
인종 재위 때 신하들이 가장 역점을 둔 일은 ‘임금에게 제대로 된 밥 먹이기’였다. 며칠 밤을 뜬눈으로 지새며 부왕을 간호했던 인종, 중종이 죽자 유교식 예법에 따라 식음을 전폐하고 슬퍼했다. 그런데 중종 사후 두어달이 지나도록 여전히 미음만 들며 식사를 하려 하지 않아서 공개 석상에서 왕의 모습을 본 신하들은 경악했다. 몸을 가누기도 힘들어하면서도 하루 다섯 차례의 곡림을 직접 행동하는 등 상례를 모두 챙기는 왕이었다. 신하들은 인종에게 몸을 챙길 것을 간언하였고 이런 승강이는 줄곡이 끝날 때까지 무려 5개월이나 계속 되었다. 지나치게 오래 금식한 때문일까. 인종은 여전히 제대로 된 식사를 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니 떨어진 체력이 회복될리 만무하고 허약한 몸에 병이 찾아왔고 병세는 급속히 악화되었다. 야사에는 문정왕후가 건넨 독이 든 떡을 먹은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약을 극구 거부하는 태도에서 보여지듯, 삶에 대한 의지나 미련은 별로 없었던 모양이다. 하여 눈을 감으니 1545년 7월 1일, 향년 31세, 재위기간은 9개월도 채 못 되었다.
대위는 동생인 경원대군에게로 넘어왔다. 문정왕후의 소생으로 바로 조선의 13대 임금 명종이다. 즉위할 때 나이는 겨우 열두 살.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중종의 세 번째 계비로 국모의 자리에 올랐던 여인 문정왕후, 아들을 못 낳아 마음을 졸였던 시간들. 경빈 박씨의 축출 , 뒤늦은 출산과 대윤과의 대립, 인종의 즉위와 죽음, 옛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으리라. 그리고 드디어 자신의 아들을 임금의 자리에 앉힌 것이다. 한없는 성취감에 고무된 문정왕후는 문안 온 대신들에게 승자의 여우와 아량을 담아 향후 국정운영의 방향을 정하였다.
문정왕후는 대윤(윤임)과 일당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중종에게서 배운 ‘밀지’방식을 이용해 소윤의 핵심들에게 돌려보게 한 후 양사의 장관을 불러 밀지를 보여주고는 짜고치는 고스톱인 을사사화를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윤원형은 윤임이 그의 조카인 봉성군에게 왕위를 옮기도록 획책하고 있다고 무고하였다. 한편 궁궐 밖으로는 인종이 승하할 당시 윤임이 경원대군의 추대를 원치 않아서 계림군을 옹립하려 하였는데, 유관·유인숙 등이 이에 동조하였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로써 윤임·유관·유인숙 등은 반역 음모죄로 유배되었다가 사사되고, 계림군도 음모에 관련되었다는 밀고로 주살되었다. 을사사화가 끝난 뒤에도 여파는 한동안 계속되어, 1547년 9월 문정대비의 수렴청정을 비방하는 뜻의 양재역 벽서가 발견되자 봉선군 또한 사사되었다. 을사사화 이래 수년간 윤원형 일파의 음모로 화를 입은 반대파 명사들은 100여 명에 달하였다.
소윤, 아니 문정왕후는 승리했다. 세자 나이 스무 살에 낳은 아들을 임금으로 만들어보리라는 말도 안 되어 보이는 목표를 세우고 끝내 성취했을 뿐 아니라 10여년의 정적이었던 대윤 세력을 일망타진해버렸다. 사화(선비:士, 재앙:禍)는 사림이 큰 화를 입는 사건을 말한다. 하지만 주로 반대파의 숙청이나, 왕권의 강화를 목적으로 특정 계층의 제거에 목적이 있다. 문정왕후는 8년간 수렴청정을 하였으며 불교를 장려하여 성리학 사상에 반하였다. 민생은 피폐해져도 왕실 친인척의 안락과 불교의 부흥에만 힘썼다.
우리의 삶이 나아지리라는 바램으로 정권교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을 그저 수탈의 대상으로만 삼고, 부채를 더하고 더하여 몇몇 기업, 기관이나 특정 계층의 삶만 나아지는 정치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것 같다. 만들어지는 정치, 여론, 힘들어지는 국민, 이러한 순환고리는 끊임없는가에 대한 안타까움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