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수 시인의 문화 산책] 여자를 만드는 남자

입력 2024.06.28 16:10 조회수 1,420 0 프린트
 
 











 - 세상의 모든 남자는 여자의 아들이다-

간밤에 천둥이 치더니 초여름비가 촉촉이 내렸다.

옆집 농부 김씨가 텃밭에 심은 감자 잎이 어느새 푸르고 무성하다. 올해에도 농부 김씨는 작년처럼 풍성하게 감자를 캘 것 같다.

감자밭을 창문으로 내다보다보니 문득 김동인의 소설 ‘감자’가 생각난다. 어린 나이에 스무 살이나 많은 무능력자 홀아비에게 팔려가 왕서방에게 몸을 팔게 되는 등 비극적인 삶을 산 ‘복녀’, 우리 민족의 시대적 수난사를 대신하여 순교한 그 복녀가 김씨네 감자밭 건너 비탈진 나무숲에서 불쑥 감자처럼 하얀 얼굴로 나타날 것만 같다.

지난해 여름, 조각가 Y교수네 작업장 텃밭에서 지인들과 하지감자를 캐던 생각도 났다.

그날은 쾌청하게 맑은 휴일이었다. Y교수가 전화로 텃밭에 심은 감자가 잘 여물었으니 오라하여 아내와 호숫가에 있는 그의 야외작업실 옆 텃밭으로 차를 몰았다. 그의 텃밭에는 이미 동창생 K사장을 비롯해 지인들 다수가 미리 감자를 한 바구니 씩 캐서 양은솥에다 푹푹 찌고 있었다. 텃밭 주위로 더운 김이 구름처럼 무럭무럭 피어오른다. 조각가가 키워내서 그런가, 잘 익은 주먹만 한 감자를 두 손으로 집어 드는 순간 묘한 착각이 들었다. 지나친 비약인지 몰라도 감자가 식욕을 채워주는 자연의 조각 작품인 것만 같은 것이었다.

새해가 되어 Y교수에게서 또 전화가 왔다. 조만간 작품전(서울국제조각페스타 2024)에 참가하게 됐다며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그리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쟁으로 불행을 겪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 했다.

하여 나는 이미 하늘나라로 올라간 천진무구(天眞無垢)한 소녀들의 영혼에 천사의 날개를 하나 붙여주는 것이 어떨까 싶어 ‘아주 가벼운 날개’란 제목이 어떻겠느냐고 문자를 보내주었다. 그러자 그는 마침 제작하고 있던 작품의 이미지와 통한다며 반색을 했다.

그리고 몇 주 후, 그는 전쟁 속에서 무고하게 숨진 어린 생명들을 위로하고 추모하는 <아주 가벼운 날개> 토로소 시리즈를 비롯해 몇몇 조각 작품들을 전시회에 내놓았다.

이번 작품전 작품들도 그렇지만 그 이전에도 Y교수는 여성을 소재로 한 작품을 많이 제작했던 것 같다. 내가 본 작품 다수가 숙명성과 연(緣)에 의한 여성의 삶을 성찰하고 가족인 아내와 딸들을 미적 이미지로 형상화해냈던 것이다.

어쩌면 Y교수처럼 여자를 작품으로 만들어내는 남자작가들도 꽤나 있는 것 같다. 그 가운데 화가 모딜리아니를 먼저 꼽고 싶다.

그는 아내 잔느 에뷔테른느의 얼굴을 자신의 초상화처럼 갸름하고 슬프게 그렸는데, 어린 시절에 교과서와 화보에서 본 그의 그림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일찍이 영화감독들도 여성스타를 많이 만들어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감독 빅터 플레밍은 스칼렛 오하라(비비안리 분)를,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감독 블레이크 에드워즈는 홀리(오드리 헵번 분)를, 헨리 킹 감독은 ‘모정’에서 한수인(제니퍼 존스 분)을 아름답고 인상적으로 만들어냈다. 또 시드니 폴락이 감독한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카렌(메릴 스트립 분)도 가끔 생각이 난다. 그녀가 생각날 때면 영화 OST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 제2악장이 그녀의 목소리인 듯 감미롭다. 그런가 하면 일본의 이와이 슌지가 감독한 인생영화 ‘러브레터’에서는 나카야마 미호(와타나베 히로코 분)가 마지막 장면에서 ‘오겡끼 데스까‘(너 그곳에서 잘 지내고 있지?)하고 호숫가에서 외치는 마지막 인사 한 마디가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다. 그밖에도 많은 감독들이 독특하고 개성적인 여자를 수 없이 탄생시키고 있다.

물론 그런 영화감독들뿐 아니라 많은 소설가나 화가, 시인들도 여러 유형의 여자를 작품 속에서 만들어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반인들도 누구나 남자라면 일생동안 그 나름의 이상적인 여성상을 마음속에서 만들고 있지 않나 싶다. 아가페적 사랑 같은, 숭고하고 헌신적인 여자 중의 여자인 어머니 같은 여자랄까.

물론 각자가 처한 환경과 심리에 따라 다르겠으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아니면 ‘시어머니가 며느리 물어들인다’는 속담처럼 남자들 상당수는 자기 아버지가 그랬듯이 어머니가 암시한 자기 어머니를 닮은 배우자를 찾아 선택하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하루하루 기온이 뜨거워지고 있다.

올여름에도 또 남자들은 마음에 그리던 여자를 만나거나 모두를 감동시킬 사랑스러운 여자를 창작해낼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니, 나도 왠지 바람에 흔들리는 푸른 감자 잎처럼 가슴이 설렌다.

차제에 Y교수가 언젠가 야외에 전시한 토로소와 이번 서울국제조각페스타 2024에 출품한 토로소를 보고 공감한 부분이 있어 졸시 한 꼭지 그려본다.

<아주 가벼운 날개>

야외전시장 밖 하늘을
하염없이 떠돌던 구름

어깨가 단단한 토로소를
내려다본다
내 몸뚱이인가?

토로소는 부서진 구름조각처럼
어깨에 날아 내린 이팝나무꽃잎 흔들어  
날개 짓한다

저 포근하고 하얀 구름이
내 얼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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