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수 시인의 문화 산책] 꽃 잔치

M스토리 입력 2024.06.03 13:44 조회수 1,970 0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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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가 하필이면 어린이날 연휴 내내 줄기차게 내렸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프로야구 경기가 중단되었고 제주도 한라산에 800mm 물폭탄이 떨어져 여행객들이 공항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이 TV뉴스에 방영되었다.

하지만 나로서는 절기를 놓칠 수 없어 잠시 비가 머뭇거릴 때 우비를 입고 텃밭에 나가 채소를 심었다. 10평도 안 되는 텃밭이었지만 고추, 가지, 상추, 파프리카, 케일, 토마토, 고구마, 옥수수, 오이, 수박을 심었다. 남들보다 한 주일 정도 늦었지만 다 심고 나서 텃밭 밭둑 여기저기에 흐드러지게 핀 고들빼기 꽃과 찔레꽃을 꺾어다 작은 항아리에 담아 감상하노라니 아, 노란 고들빼기 꽃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또 찔레꽃 향이 그렇게 그윽한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하여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어 여기저기 지인들에게 카톡으로 보내주다 보니 단톡방에 내가 쓴 졸시 세편이 올라있음을 알게 되었다. 동기회 총무가 개교 100주년 기념 문학작품집에서 복사하여 올려놓은 것이다.

그것을 동기들 몇 명이 읽었는지 댓글도 올라 있었다. 방금 항아리에 꽂은 꽃들처럼 정겹고 고마웠다. 같은 부모 형제라도 생각이 각각 다르듯이 표현이 다양했는데 두 명은 이모티콘으로 읽었음을 표시해주었고 고급장교 출신인 S는 댓글로 ‘잘 읽었노라’고 감상을 달아주었다. 또 동기회장은 언젠가 몰래 찍은 내 근영사진을 올려주었고 아파트관리사로 제2의 인생을 사는 P와 제주도에 사는 친구 H는 그 사진이 너무 젊다느니 멋지다느니 느낌을 보내주었다. 그런가하면 한 친구는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기 난해한 추상적인 한글자음 이니셜을 올려놓았다. 어떤 형태로든 표현을 해준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설사 비난하는 댓글이라도 미래를 걱정해주는 동지나 한 가족처럼 그 표현의 수위만큼 관심이 있다는 것이기에 나는 개인톡으로 그에게 ‘생각해 줘서 고맙다’고 문자를 보내주었다.

또 한 친구는 개인톡으로 ‘내가 어디에 사는 지 묻고, 한 번 만나자’는 문자를 보내왔다. 실로 반가운 메시지다. 그래서 나도 그에게 그날을 기대하며 ‘연락하자’고 답신을 보내주었다. 나 역시 내가 쓴 시를 그가 읽어주었듯이 그가 살면서 이룩한 성과와 스토리를 들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차제에 그들이 읽었을 졸시 세편 가운데 <꽃잔치>를 다시 한 번 읽어보았다.

<꽃잔치>

오늘은 누구의 생일인가
재개발지역 풀숲에 잔칫상이 놓여 있다
모서리가 깨진 나무밥상에 들꽃들이 빙 둘러앉아
풀벌레가 부르는 축가를 듣는다

사람이 없어 향기로운 재개발지역
들장미 엉겅퀴 코스모스 달맞이꽃……
어제 보고 오늘 또 보는

풀벌레가 먹다 남긴 꽃잎 나풀나풀

어디 오라는 곳 없으면 와서 껴앉으라고
차린 건 없지만 향기나마 한 술 뜨자고

나를 부르네
나를 세우네

이 졸시는 우리 아파트 마을이 재개발될 무렵에 쓴 시다.

우리 가족도 재개발지역 주민이라 이주비를 받아 인근 마을에서 전세를 살고 있었는데 어느 휴일 저녁에 산책하느라 철거대상 지역을 지나다보니 누군가 이사하면서 버리고 간 낡은 밥상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잡초들이 그 동그란 밥상 주위에 둘러앉아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고 있는 게 아닌가! 마치 생일잔치 상에 모여 앉은 것처럼, 그리고 주위가 소란스러웠는데 마침 풀벌레가 생일축가를 불러주는 것만 같았다. 순간, 그 옛날 그 밥상의 주인네 가족들이 그렇게 꽃들처럼 둘러앉아 웃고 떠들며 즐겁게 밥을 떠먹었을 모습이 연상되었다.

어쩌면 댓글을 달아준 친구들도 재개발하는 아파트처럼 새로운 인생을 사는 때가 아닐까 싶다. 어느덧 다들 정년을 지나 나름대로 새 인생을 살아가는 시점이지 않은가. 그동안 꿈 꿔왔던 자기스타일의 집을 짓는 친구도 있을 것이고, 먹고 사는데 바빠 실행하지 못했던 취미생활을 비로소 찾아 열정을 기울이는 친구도 있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몇 년 전에 행사관계로 서귀포에 들렀을 때 H가 정년퇴직을 하고 아버지가 물려준 감귤 농장 안에다 새롭게 저택을 짓고 있었다. 그처럼 어떤 친구도 감탄이 나올 정도로 멋진 저택을 짓고 가든파티를 연 사진을 단톡방에 올린 적이 있다. 지인이나 동기들을 초대하여 고기를 굽고 술잔을 돌리는 그 풍경은 실로 볼수록 부럽고 또 부럽다. 그 별장 같은 저택도 부러웠지만 그날 울려 퍼진 친구들의 대화와 웃음소리가 마치 작은 오케스트라를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그 가든 음악회는 어쩌면 각자가 작곡자이고 연주자이고 관객인 것이다. 하여 그 가든 음악회엔 시기와 질투 권모술수 같은 불협화음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음악회는 어쩌면 아오마 요가 명상센터 K원장이 추구하는 음악명상과도 맥을 같이하는 음악회가 아닐까 싶다.

최근엔 존 케이지의 음악과 함께 명상의 길을 가고 있는 K원장은 원래 작곡이 전공이었는데 독일 유학시절에 운명적으로 요가를 접하여 인도로 건너가 철학박사가 되었고 음악명상분야에 있어서 세계적인 권위자가 된 친구이다.

어찌 보면 인생을 재개발하고 재건축한 모범적 인물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싶다.

그런 인물이 또 하나 있다. 교장을 역임한 L이다. 그는 중·고등학교 때 브라스 밴드 단원이었는데 대학에서는 체육교육을 전공한 친구다. 그는 S의 사촌 여동생과 몇 해 전에 재혼하여 한옥을 리모델링하고 지난해에는 학교와 동네친구들을 초대하였다. 하여 어린 시절 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했던 교우들과 어울려 그 한옥에서 하룻밤 유숙하며 부인(고유전통술 명장)이 담근 향기로운 술도 한잔하고 끓여주는 차(茶)도 마시며 훈훈하게 지낸 기억이 삼삼하다. 참으로 즐겁고 행복했던 하루였다. 마치 그의 한옥 집에서 우리의 우정은 그의 인생처럼 새롭게 출발한 것만 같다.

인생 3막이랄까?

오늘도 재개발지역에 놓여있던 그 낡은 밥상과 꽃들을 회상하며 친구들 얼굴을 하나하나 마음에 새겨보고 그들과 함께 내일을 감감히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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