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벅터벅 사색(史索) 중] 흥청망청(興淸亡淸)

M스토리 입력 2024.06.03 13:17 조회수 1,561 0 프린트
 

유교 정치는 왕권의 지나친 확대를 견제하는 장치를 담고 있어서, 유교 정치가 자리 잡을수록 군약신강(君弱臣强)의 양상이 나타나게 된다. 이 때문에 강력한 왕권을 추구했던 태종이나 세조는 신하들의 견제 장치를 크게 제한하였다. 경연을 정지시키고 대간들의 활동도 위축시켰다. 하지만 태종도, 유교보다 불교를 더 숭상했던 세조도 대간 자체를 폐지하지는 않았다. 말하자면 대간을 없애버린다는 것은 국시를 거스리는 반체제적인 행위라 하겠다. 그러나 연산은 달랐다. 연산은 유교식 견제 장치들을 모두 제거해나갔다. 임금에게 간하는 사관원을 폐지하고 사헌부도 축소시켜 조사들에 대한 감찰 기능만 남겨놓았으며 홍문관도 폐지하였다. 견제 장치들을 제거한 연산은 한걸음 더 나아가 성균관과 사학의 활동을 사실상 정지시켰으며, 과거도 경전 대신에 율시로 대체했다. 연산은 유교식 장례나 제례도 못마땅해했다. 어머니를 죽인 할머니 인수대비가 미워서 그녀의 장례 절차를 축소해버렸다. 친모인 폐비 윤씨의 제삿날엔 후원에서 여럿이 보는 가운데 성관계를 갖기도 했다. 

연산은 군신간의 구별을 분명히 하기 위한 제도를 계속 강화시켰다. 조참시에 백관을 모두 꿇어 앉히도록 하고, 길을 가다 승명패를 만나면 조관은 말에서 내려 몸을 굽히고 지나가던 이는 엎드리게 하였다. 행여나 실수로 처벌을 받게 될까봐 ‘승명패가 떳다’는 소리를 들으면 사람들은 삽시간에 자취를 감춰버렸다. 내관들이 차던 신언패를 조관들도 차게 하는가 하면, 막바지엔 사모의 앞뒤에 ‘충성’자를 새겨넣기도 했다. 임금을 높이고 신하를 낮추는 조치의 백미는 가마꾼 선정에 있었다. 급기야 하급 문신은 물론 대간들에게까지 가마를 매게 한 것이다. 

이렇듯 연산은 폭압을 통하여 황제적 권력을 구축하였다. 그런데 중국의 경우를 보면 연산보다 더 가혹한 정치를 하고도 후세에 명군으로 평가받는 황제들이 있다. 그런 황제들의 공통점은 신하들에게는 가혹했지만 나라를 튼튼히 하고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연산에겐 그렇게 강화시킨 왕권을 가지고 나라와 백성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설계와 구상이 없었다. 넘볼 수 없는 왕권을 구축하는 것 그 자체와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자신의 향락을 즐기는 것만이 지상 최대의 목표였다. 사냥을 즐겼던 연산이 한번 움직이면 행차가 지나가는 주변의 모든 민가를 비워야 했다. 또한 궁성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금을 그어 왕 전용지를 만들었다. 필요하면 금표 안의 집도 허물고 논밭을 사냥터로 바꾸기도 했으며 분묘들은 허물어 버렸다. 금표는 계속 넓어져 사방 100리에 이르렀다. 경기 관찰사 송질이 아뢰기를 “경기도 땅이 반 넘게 금표 안으로 들어갔사옵니다. 충청도의 고을을 잘라 경기도에 붙여주소서”라고 하자 연산의 허락하에 평택의 땅이 경기도로 편입되었다.
 
 
연산은 예술 방면이 발달한 사람이다. 시를 좋아하고, 노래와 춤을 즐겼다. 특히 처용무를 즐겼는데 연산이 처용무를 추면 다들 넋을 잃고 바라보았고, 죽은 자의 우는 연기라도 할라치면 기생들도 모두 따라 울어 연회장이 통곡의 자리로 바뀌고 하였다. 그의 미의식은 웅장하고 화려한 것을 추구하였다. 새롭게 짓는 궁의 정전은 청기와를 덮도록 하였으며, 규모도 웅장하였다. 기생들은 물론 궐 안의 노비들도 깨끗한 옷을 입도록 명하였고 서민들에게 넓은 소매를 권장했으며, 품계가 낮은 신하들에게도 흉배를 달게 하고 비단옷을 장려하였다. 

연산이 가장 관심을 기울인 일은 잔치를 베풀어 마음껏 태평을 누리는 것이었다. 천 명의 악공이 연주를 하고 천 명의 기생들이 노래하고 춤추게 하는 태평성대에 걸맞는 호화 찬란한 잔치를 하고 싶었다. 장악원의 기생 수를 천명으로 늘리고 흥청과 운평으로 서열을 나누라 명하였다. 기생을 채우기 위해 지방 수령들을 닦달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사람을 각지로 보내 직접 뽑아오게 했다. 이들을 ‘채홍사’라고 불렀다. 기생 출신의 첩들이 우선적으로 선발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기예도 되고 용모도 받쳐주는 이는 드물어서 나중엔 얼굴이나 신체에 흠이 있어도 운평에 선발되었다. 운평 중에서도 용모와 재주가 빼어난 자가 흥청이 되었다. 흥청의 가족들에겐 서울로 올라오게 하여 집과 땅을 주었고, 각종 역을 면제시켜주었다. 흥청은 다시 왕의 사랑을 받은 천과(天科) 흥청과 그렇지 못한 지과(地科) 흥청으로 나뉘었는데 천과 흥청의 위세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했다. 천과 흥청이 사저로 나들이를 할 때면 도승지와 좌승지가 앞에서 인도하고, 선전관과 감찰이 뒤를 따랐다. 지방 수령들은 흥청은 물론 그 가족들에게도 쩔쩔매었다. 이에 흥청의 친인척을 사칭한 각종 사기 사건이 생기기도 하였다. 말년엔 1만 명 이야기까지 나왔을 정도였지만 실제 흥청 및 운평 수는 2천 명이 넘지 않았던 것 같다. 연산의 구상대로 1천 명의 운평이 노래하고 춤추는 연회가 자주 열렸다. 한 번의 연회에 소 8~9마리가 도축될 정도로 풍성한 연회가 열렸다. 연산은 식성도 특이하여 소의 태나 사슴의 혀 등의 요리를 즐겼다. 대형 연회엔 장막을 사용하였지만 흥청들과 노는 중소형 연회를 위한 무대가 필요했다. 창덕궁 후원에다 제2의 경회루를 더 크게 짓도록 하고 공사를 다그치니 이것이 폐위 즈음에 거의 완성을 본 서총대이다. 망원정을 헐고는 2천 명이 앉을 수 있는 초대형 정자도 지었다. 연산은 또 후원에다 동물원을 만들었다. 구경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냥을 위한 동물원이었다. 호랑이나 곰 같은 맹수들은 우리에 가둔채로 사냥을 즐겼다. 
 
 
전무후무한 황제급 왕권은 이렇듯 백성들을 위한 것이 아니고 연산의 즐거움을 위해 쓰였다. 사실 궁중의 피바람도 백성들에게는 별 이해관계가 없는 일이었다. 연산의 쓰임새가 커지기는 했지만, 처음 얼마간은 죽은 이들에게서 몰수한 재산으로 충당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곧 사정이 달라졌다. 금표를 세워 쫓아내지를 않나, 연일 잔치를 하기 위해 집집마다 들이닥쳐 여자와 소와 말을 끌고 갔다. 이것이 연산이 단지 폭군이고 암군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조선을 건국하고 100여년 동안 선왕들의 노력으로 기틀을 마련하고 비로소 나라다운 면묘(面貌)를 갖추었거늘, 연산에게선 조선을 개인의 사유물과 놀이의 대상으로만 여겼을지언정 백성을 사랑하는 왕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우연일수도 필연일수도 있겠지만 ‘법구경’에서 강조하는 탐진치(貪瞋癡), 탐내어 그칠지 모르는 욕심과 노여움과 어리석음의 진수를 보여주는 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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