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수 시인의 문화 산책] 꽃도둑

M스토리 입력 2024.04.30 14:48 조회수 1,751 0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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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을 일구다 주변에서 자생하는 찔레와 싸리꽃, 버들강아지를 꺾어 질항아리에 담아 방안에 들여놓고 보니, 이제 비로소 봄이구나 싶다. 다시 밖으로 나가 텃밭 인근에 자생하는 산동백(생강나무)꽃을 따서 꽃차를 우려 한 잔 마시노라니 신선이 부럽지 않다. 쑥을 뜯고 달래, 냉이를 캐고… 시골 생활의 호사랄까, 하루하루가 꿈만 같다. 마치 동네 아이들과 나물 캐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아련한 느낌도 든다. 성장하여 이젠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내가 아닌데… 왜 그렇게 생생히 느껴지는 것일까?
서산대사의 시에서 그 답을 살펴본다.

<고영유감(顧影有感)>
어머니와 일별한 후                        
(一別萱堂後 일별훤당후)

도도히 흐르는 세월 깊어가네
(滔滔歲月深 도도세월심)

늙어도 여전히 어리고 얼굴은 아버지라
(老兒如父面 노아여부면)

연못 바닥 들여다본 마음 홀연 놀라네
(潭底忽驚心 담저홀경심)

훤당(萱堂)은 친구네 어머니를 높여 부르는 경칭이다. 친했던 그 친구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오랜 세월이 흘러 늙었건만 나를 만나면 여전히 어린아이 때처럼 유치하게 행동을 한다. 그리고 늙어갈수록 아버지를 닮아가는 모습이 역력하다. 그런데 나 역시 어느 날 연못가를 지나다 연못 바닥에 비친 내 모습을 들여다보고는 홀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 역시 연못에 비친 내 그림자를 통해 아버지의 모습을 본 것이었기에.

이 시는 삶의 무상(無常)함과 무아(無我) 그리고 아버지와 나 그리고 친구와 내가 둘이 아닌, 불이(不二)의 자기 성찰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다.

그렇다. 어머니나 아버지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나는 성장을 멈춘 것 같고 마치 어린아이 때로 돌아간 것 같다. 문득 어디선가 어머니의 목소리가 아슴푸레 들려와 오늘도 나는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등교하듯 출근을 한다.

『길조심하고… 밥은 꼭 챙겨 먹어라…』

우리어머니는 가끔 누가 동네에서 떠도는 소문을 들려주면 이렇게 말씀을 하시곤 했다.

『냄새 안 나는 방귀가 어디 있겠누?』라고.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와 같은 어머니 나름대로의 비유다.

음식물이 소화되어 가스로 빠져나오는 방귀는 냄새가 안 날 수가 없는 유기물인 것이다.

누군가 인터넷에서 질의를 했다. ‘헬스를 시작하고 나서부터 방귀가 자주 나오는데 냄새는 안 난다. 그런 방귀도 있는가?’ 라고.

이에 대해 한의사 K원장은 이렇게 답변했다. ‘먹는 음식에 따라, 방귀에는 다양한 가스가 포함 되는데, 보통 <황>성분이 많은 가스일 때 냄새가 심하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냄새가 심하지 않을 수 있다.’고.

아궁이에 불을 때지 않으면 연기가 나지 않고, 또 땔감의 종류에 따라 연기의 색깔과 냄새가 다를 수 있다. 결국 소문은 방귀와 연기와 같은 형태의 결과물인 것이다. 인과응보(因果應報)랄까.

그런데 살다보면 원인과 결과가 전혀 다른 경우를  TV뉴스나 직장 주변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적반하장(賊反荷杖)>이나 <똥 싼 놈은 달아나고 방귀 뀐 놈만 잡힌다.>는 속담 같은 경우가 그것이다.

그런 속담은 억울하게 상처를 입은 사람을 위로하고 쓰다듬어주는 우리네 선조의 지혜로운 처방이요, 선한 마음이 아닌가 싶다.

그런 처방 같은 속담이 또 하나 있다.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속담이다. 나는 이 속담을 생각하면 감회가 깊다.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이었던가, 이웃동네 고철수집소 앞을 지나가는데 때마침 트럭에서 수집해온 고철을 부리고 있었다. 그 광경을 구경하고 있자니 내 앞으로 녹슨 철물 하나가 굴러 떨지는 게 아닌가. 나는 우리 동네 목수아저씨가 그 철물로 작업을 하던 기억이 나서 슬쩍 호주머니 속에 집어넣고 집으로 왔다. 하지만 그날 밤, 나는 바늘에 온몸을 마구 찔리는 꿈을 꾸었다. 하여 소도둑이 될까 두려워 아침에 일어나는 대로 고철수집소에 다시 가서 그 녹슨 철물을 던져놓고 돌아왔던 것이다. 조상들의 지혜의 덫에 걸려든 나만의 웃픈 성장통이 아닐 수 없다.

변명이지만 도둑질은 인간의 본능 같다.

이따금 작고한 정신과의사 최신해원장의 수필집 『훔친 사과가 맛이 있다』가 생각난다.

그리고 학생 시절에 극장에서 본 영화 ‘내 이름은 튜니티’도 생각난다. 아예 도둑질과 강도짓, 노름을 희화화한 그 영화의 시작부분에 보면 동생인 튜니티(테렌스 힐 분)와 형 밤비노(버드 스펜서 분)가 집을 떠나 온갖 잡놈질을 하다 집으로 돌아온다. 사막 한 가운데 있는 집에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살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큰아들 밤비노에게 이렇게 말한다.

“얘야 네가 형이니까 하는 말인데, 네 동생에게도 소도둑이든 역마차 습격이든 아니면 도박이든 뭐 좀 가르쳐줘라.”

서로 의가 좋지 않은 두 형제가 친해지기를 기대하며 아버지가 당부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탈리아 산 서부극이긴 하지만 미국서부개척시대의 험난했던 역사의 한 단면을 불량가족을 통해 코믹하게 보여준 풍자영화가 아닐 수 없다.

그들처럼 작금의 나 역시 봄꽃을 하느님이나 산주(山主) 허락 없이 슬쩍 훔쳤으니 그들과 별반 다를 게 없는 삶이 아닌가, 우려된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그것은 사실 그 봄꽃의 종족번식의 덫에 내가 속절없이 걸려든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우리 어머니의 말씀을 패러디하자면 ‘어디 향기 안 나는 꽃이 있을까?’인데.

향기가 아니라 악취가 나는 꽃도 있기에 그렇다.

‘라풀레시아’라는 꽃은 세상에서 가장 큰 꽃으로 유명하지만 시체 썩는 냄새로 더 유명하다. 수분(受粉)을 하기위해 몇 십 리 밖에 있는 파리들을 끌어들이느라 그런 대형 꽃을 피우고 악취를 풍기는 매머드 유인작전을 쓰는 것이라 한다. 향기이건 악취이건 결국 공리(公利)랄까, 그 라풀레시아라나 찔레와 싸리꽃, 버들강아지나 산동백 모두 다 같이 한 가지 목적을 갖고 있는 것이다. 자기보전의 종족번식.

나는 곧 수일 내에 텃밭에다 각종 채소를 심을 것이다. 그러면 또 꽃이 만발할 것이고 벌과 나비 그리고 수많은 곤충(해충 포함)들도 수 없이 모여들 것이다.

나는 그 밭 도둑 곤충들보다 더 빨리 채소를 뜯어다 어머니를 생각하며 쌈을 싸 먹고 비빔밥도 푸짐하게 해먹을 요량이다.

꽃도둑이 이제 채소도둑이 되는 것인지는 몰라도 하루하루가 기다려지는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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