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명회의 사위라는 이유로 왕에 오르게 된 성종은 마침내 조선 통치체제의 기본법인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완성하기에 이른다. 대외적으로 북쪽의 명나라에는 건국 이후 초기 안정화 단계에 이르고 있었으며, 남쪽의 일본에는 전국시대로 다이묘들의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 대외적으로 눈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이에 조선은 태평성대 시대가 열린다.
1480년(성종 11) 성리학에 반하는 어우동의 연애 스캔들이 한성 내에 소문이 퍼지자 진상을 요구하는 공론이 형성되었다. 사림의 대부인 김종직과 그가 이끄는 사림파 출신 사간원, 사헌부와 언관, 훈구파에 의해 집중 공격을 받고 어우동은 의금부에 끌려왔다.
어우동이 옥중에 있을 때 그녀의 전 애인이었던 방산수(方山守) 이난(李瀾)이 이르기를 “예전 세종 시대에 ‘유감동’이라는 자가 많은 간통으로도 중죄를 받지 아니하였으니, 너도 사통한 바를 숨김없이 말하면 중죄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어우동은 관계를 맺은 17명의 이름을 늘어놓기 시작하였다.
어우동은 승문원 지사(외교부 국장) 박윤창의 딸로서 태종의 증손자 태강수(泰江守) 이동(李仝)과 결혼하였으며 딸 하나가 있었다. 후사를 잇지 못한다는 이유로 어우동은 시댁의 무시와 냉대를 받기 일쑤였다. 이동은 누명을 덮어씌워 딸과 어우동을 버렸다. 덮어씌운 누명에는 어우동이 집에 은그릇을 만들려고 찾아온 은장이와 간통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종이 조사해본바 어우동의 간통 사건은 무죄였고, 기생을 사랑한 남편 이동의 잘못으로 밝혀져 이혼은 무효화 되었다. 어우동과 재결합하라는 명을 받았으나 이동은 이를 거부하였다. 이동은 삭탈관직 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복권되고 어우동은 법적으로는 태강수 이동의 부인이었지만 버림받은 처지가 되었다.
그 뒤 어우동은 딸과 종을 데리고 친정으로 갔으나 아버지 박윤창은 받아주지 않았다. 어우동이 홀로 앉아 슬퍼하며 탄식하자, 여종이 그녀를 위로하길 “사람이 살면 얼마나 살기에 상심하고 탄식하십니까? ‘오종년’이란 이는 일찍이 사헌부에 관리가 되었고 용모가 아름답기가 태강수보다 월등히 나으며, 신분도 천하지 않으니 배필을 삼을만 합니다. 만약 생각이 있으시면 제가 불러오겠습니다.”라고 했다. 어느 날 여종이 ‘오종년’을 불러오니 어우동이 이를 맞이하였다. 남편 이동에게 이혼당한 뒤 그녀는 수십명의 선비, 조관 및 유생들과 관계를 가졌으며, 그 내용은 대동야승, 용재총화, 성종실록 등에 기록으로 남아 전해진다. 이후 그녀는 정식으로 기녀 수업을 받고 기녀가 된다.
어우동은 기생이 되어 기방에 출입하던 남편의 6촌인 세종의 손자로 계양군의 서자 방산수(方山守) 이난(李瀾)을 만나 사귀게 된다. 이난은 어우동의 춤과 시, 재색에 매료되어 그녀를 자주 찾았다. 정이 매우 두터웠던 나머지 이난은 자기 팔뚝에 어우동의 이름을 문신으로 새기고, 뒤에 체포되었을 때 끝까지 그녀를 변호하고 선처를 호소하였다.
어우동은 관계에만 국한되지 않고 시문과 가야금을 잘 다루고 춤을 잘 추었던 탓에 여러 문사들이 그녀를 보고자 직접 찾아오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의 신분을 기생 혹은 내금위의 첩, 혹은 과부라고 소개하였고 왕족부터 노비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집에 출입하였다.
어우동은 글쓰기를 하며 세상에 도전한 주인공이 되었다. 기생이라는 신분을 이용해 수많은 남자들과 여염집 여자들은 꿈도 못 꾸는 자유로운 문예 활동을 하였다. 여자가, 기생이 글을 쓰고 서예를 한다고 사대부들이 비웃었지만 그녀는 사람들을 탄복시킬 정도의 실력으로 글과 서예를 갈고 닦았다.
이미 더이상 꺼리낄 것이 없이 대담해진 그녀는 과거에 합격한 ‘홍찬’을 간통하고 싶은 마음에 길에서 소매로 그의 얼굴을 슬쩍 건드리고 ‘홍찬’을 끌어들여 정을 통하기도 하였다. 어우동은 상대가 양반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었다. 서리(書吏) 감의향이 길에서 어우동을 만나자 희롱하며 그녀의 집에까지 따라가 간통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그는 등에다 이름을 문신으로 새기기도 하였다. 어우동의 자유분방한 생활은 마침내 조정에까지 알려졌으며 풍속을 어지럽혔다는 이유로 체포당하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이 사건을 두고 사형과 유배로 의견이 나뉘었다. 승정원은 어우동의 죄를 대명률(大明律)의 ‘남편을 배반하고 도망하여 바로 개가한 것’으로 정해 교부대시(絞不待時, 때를 기다리지 않고 바로 형을 집행)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그녀를 처형해야 한다는 비난 여론이 계속되었고, 성종은 법률에 따라 귀양이나 유배로 형을 정하고 불문율에 부치려 하였으나 탄핵은 계속되었다.
심회는 “어우동의 죄는 율을 상고하면 사형에 이르지는 않으나, 사족의 부녀로서 음행이 이와 같은 것은 강상에 관계되니, 청컨대 극형에 처하여 뒷사람의 경계가 되게 하소서”라고 극형을 주장하였다. 윤필상도 “어우동은 강상을 무너뜨렸는데도 죽이지 않으면 음풍이 어떻게 그치겠습니까? 남녀의 정은 사람들이 크게 탐하는 것이므로, 법이 엄격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장차 욕정을 자행하여 정나라, 위나라의 풍속이 이로부터 일어날 것이니, 극형에 처하여 나머지 사람들을 경계하소서”라고 하였다.
결국 성종이 승정원과 양사의 탄핵을 승인하자, 삼종지도(三從之道)를 문란하게 하였다는 죄명으로 어우동은 교형에 처해졌다. 반면 어우동과 간통한 혐의가 있던 남자들에 대한 처벌은 관대하였다. 여러 사람들의 이름이 거론되어 실제로 문초를 당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죄가 면해지고 석방되었다.
어우동의 처지와 생활이 지금으로서는 이해가 되지만, 이혼을 당하고 심리적 변화로 노비에서 왕족에 이르기까지 자유분방한 연애 활동을 했던 어우동을 당시 유교 사상에서는 포용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