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양대군과 비루한 한명회의 만남
한명회는 조선 개국 직후 명나라에 가서 “조선” 국호를 승인받고 돌아온 ‘한상질’이 그의 할아버지다. 일곱달 만에 태어난데다 어려서부터 부모를 잃어 작은할아버지 집에서 자라야 했으니 순탄치 않은 삶이었다. 권람과는 달리 세상에 나가 뜻을 펼쳐보고 싶은 욕망에 과거에 응시했지만 번번이 낙방의 쓴 잔을 들이켜야 했다. 한명회는 계속되는 과거 낙방에 할 수 없이 자존심을 버리고 음직으로 벼슬을 얻었는데 ‘경덕궁직’이란 자리였다. 경덕궁은 태조가 잠저 시절에 살던 개성에 잇는 집을 말하는데 그 곳의 관리를 맡게 된 것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 서울 출신으로 개성에서 벼슬을 하는 이들이 송도계라는 친목계를 만들기로 했는데, 그곳에 한명회가 참석하자 “경덕궁직도 벼슬축에 들어가나?”라고 수모를 주었다. 권람은 과거에 장원급제하고 <역대병요>를 수양대군과 함께 편찬하며 친근한 관계였던 바 친구인 한명회의 제안과 수양대군의 뜻에 자리를 마련하게 된다. 그렇게 수양대군과 한명회 야심가 둘은 만나게 되었다.
계유정난(癸酉靖難)
한명회는 안평, 김종서, 황보인 쪽에 정보망을 구축하고 정보를 수집하는 동시에 내금위 소속 등 주요 위치에 있는 무사들을 포섭하였다. 또한 주력을 담당할 무사 홍달손, 양정, 유수을 데려와 충성 서약을 받는 등 준비를 철저히 하였다. 또한 기망책으로 수양대군은 명나라에 고명사은사(새 임금의 계승을 황제가 승인해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를 하러 중국으로 가신 사신)를 자청하게 된다. 만일을 대비하여 황보인과 김종서의 아들들을 종사관으로 데리고 가기로 한다. 이렇듯 단종과 대신들, 안평대군을 안심시키며 한편으로는 거사 준비를 철저히 하게된다.
대호 김종서의 제거
먼저 권력의 가장 핵심인 김종서를 제거할 날을 음력 10월 10일로 정한 뒤 먼저 권람이 방문하여 상황을 살피고 얼마 뒤 수양대군이 방문하였다. 김종서는 수양대군에게 집안으로 들어오라고 청하였으나 수양대군은 사모뿔이 떨어져 빌려달라는 핑계로 들어가기를 거부했다. 수양대군이 김종서에게 드릴 청이 있다며 편지를 내밀자 달빛에 비춰보기 위해 한눈을 파는 사이 종 임운이 철퇴로 김종서를 내리쳤고, 이어서 김종서의 아들 김승규와 그 동료들을 철퇴로 내리치니, 계유정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 때 임운의 철퇴에 맞은 김종서는 가까스로 일어나 입궐하기 위해 여장을 하고 가마에 올라타 도성의 사대문을 돌지만 모두 문을 열어주지 않자 차남 김승벽의 처가로 피신한다. 다음날 다시 수양은 김종서에게 양정을 보낸다. 대신들의 죽음을 몰랐던 김종서는 자신이 투옥되는 줄 알고 “정승이 어찌 걸어가느냐? 초헌을 내오너라.”라고 말하는 순간, 양정은 가차없이 김종서의 목을 베었다.
살생부
이후 수양대군은 사대문과 주요 군 시설을 장악한 뒤, 시좌소로 들어가 단종에게 김종서가 안평대군과 짜고 역모를 획책했다고 보고한다. 단종의 명을 빙자하여 조정 대신들을 모두 입궐하게 한다. 재상들이 들어올 때 첫 번째 문에서 종은 기다리게 한 채 두 번째 문으로 홀로 들어오는 순간 수양대군과 반대되는 대신들을 홍윤성과 함귀, 구차관 등이 철퇴로 내리치는 것이었다. 김종서의 일파로 살생부에 적힌 영의정 황보인, 이양, 조극관 등은 모두 철퇴에 맞고 살해되었으며, 입궐치 않은 대신들 이영민, 조번, 김대정, 하석 등은 자택으로 자객을 보내 죽였다. 안평대군은 강화도에 유배시켰다가 의금부를 통해 사약을 내렸다. 이로써 정적을 모두 제거한 뒤 수양대군 자신은 영의정과 권력을 모두 장악하여 사실상 재위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수양대군과 정인지 등은 단종을 압박하여 집현전으로 하여금 자신을 찬양하는 교서를 짓게 하는 등 집권태세를 공공히 하였다.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여 1455년 마침내 단종이 양위하여 수양대군은 조선의 제7대 왕 세조로 등극하게 되었다.
최근에 개봉한 ‘서울의 봄’의 명대사 “실패하면 반역, 성공하면 혁명 아닙니까?”라는 대사가 떠오르는 역사의 한 페이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