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벅터벅 사색(史索) 중] 모범생 쫄보 세종

M스토리 입력 2024.01.31 15:03 조회수 1,166 0 프린트
창경궁 자격루

조선을 건국한 할아버지 태조(이성계)와 두 번의 왕자의 난을 통해 정권을 잡은 태종(이방원)과 달리 전혀 왕권을 꿈꾸지 않다가 태종에 대한 양녕의 반항으로 졸지에 왕이 되어버린 충녕, 세종은 왕을 꿈꿔 세자 수업을 받은 것이 아니라 맘껏 자신이 하고 싶은 학문에만 전념하였던지라 학문의 연구와 개선에는 탁월했으나 정치에 대한 심리나 영토를 확장하거나 근엄한 군주로서의 자태는 갖추지 못한 듯하다.

1. 백화만발의 시대
- 집현전 -
세종은 집현전과 왕립도서관인 장서각을 지어 학자들에게 연구 환경을 만들어주었으며 점차 기틀이 잡히고 인원이 늘어가면서 학문연구, 저술, 국정자문 등의 일을 맡기게 된다. 또한 효과적인 공부를 위해 사가 독서제(집에서나 절 같은데 가서 업무를 잊고 공부에만 전념하도록 하는 제도)를 실시하기도 했다. 집현전은 자문을 넘어 새로운 정책 결정의 가부를 결정지을 만큼 권위를 갖게 되었다. 
 
- 저술 -
집현전에서 길러진 학자들에게 세종은 저술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켰으니 그 산물이 <농사직설> 조선식 농업기술서가 나오고, 중국 의학 서적을 바탕으로 중국 약재에만 의존하던 것을 우리 산천과 우리 몸에 맞는 약재로 대체하고자 <향약집성방>을 편찬하며, 뒤에 동양 최대의 의학 백과사전인 <의방유취>가 편찬되었다. 세종의 지휘 아래 집현전 학자들은 <8도 지리지>, <오례의>, <동국정운> 등 각 분야의 굵직한 성과물이 나왔으며 세종이 특히 중시한 것은 <자치통감>으로 학문하는 길은 경전을 근본으로 삼고 역사를 모르면 그 학문이 넓혀지지 못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백성들의 교육을 위해 우선 가장 쉽게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인 <훈민정음>을 만들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삼강행실도>를 편찬하였다. 이를 보급하기 위하여 인쇄술의 책임자를 ‘이천’으로 명하고 “갑인자”를 만들어냄으로써 인쇄 속도를 20배나 개선시켰다. 

- 과학기술 -
세종 4년 1월 1일, 일식이 있어서 임금과 백관은 인정전 앞에서 소복을 입고 구식례(일식, 월식으로 인한 재앙을 물리치는 의식)를 행하였다. 그런데 이날 일식을 예보했던 담당관은 예보한 시각이 1각이나 틀렸다는 이유에서 억울하게 곤장을 맞아야 했다. 중국의 것을 가져다 써서 일식 계산에 오차가 생긴 것을 모르지 않았던 세종은 두가지 방향으로 ‘독자 역법계획’을 진행시켰다. 정초, 이순지에게 천문과 수학에 능한 이들을 모아 역서를 연구, 관측기구 제작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게 하고, 이천, 장영실에게 관련 자료를 연구하여 필요한 관측기구를 제작하게 하였다. 양 팀의 협력으로 간의, 규표, 혼천의 등 천문 관측기구들이 만들어져 설치되었다. 이를 이용해 한양의 북극 고도가 확인되고 칠정(해, 달, 수성, 금성, 화성, 토성, 목성)의 운행 궤도와 주기도 밝혀졌다. 천문관측기구 제작과 맞물려 발전한 것이 시계 제작 기술이다. 물시계인 자격루가 만들어지고 ‘일정성시의’란 이름의 천체 관측 기능을 겸한 별시계가 만들어졌다. 양부일구를 시작으로 다양한 해시계가 만들어졌으며 자격루가 시각을 알리면 경회루 남문, 광화문, 영추문, 월화문에서 이를 받아 북을 치니 밤에도 사람들이 시간을 알 수 있었다.

2. 북방 개척의 시대
- 4군 -
1432년(세종 14년) 1월, 이만주 휘하의 야인 기병 400여 명이 얼음 언 압록강을 건너 여연군을 공격하는 도발을 감행한 것이다. 48명이 살해되고 75명이 납치되었으며, 마소도 100여 두가 끌려갔다. 흔히 우리는 4군 6진 이전의 국경선이 압록강, 두만강 아래로 알고 있으나 야인과의 분쟁지역으로 명확화가 안 된 것이지 이미 통치권은 그곳까지 미치고 있었다. 도발에 대한 즉각적인 대응으로 총사령관 최윤덕 하에 15,000명의 군사를 조직하여 야인을 공격하여 쉽게 4군(자성군, 우예군, 여연군, 무창군)의 영토권을 확보하게 되었다. 

- 6진 -
최윤덕의 정벌전이 성공하자 자신감을 얻은 세종은 곧바로 두만강 쪽으로 눈을 돌렸다. 때마침 이만주 세력이 쳐들어와 동맹가첩목아를 살해하고 아들을 납치해 간 일이 벌어졌다. 이를 명분으로 삼아 오랫동안 승지로 데리고 있던 김종서를 파견하게 된다. 김종서의 주도 아래 기존의 경원, 영북 외에 회령, 경흥, 온성군이 설치되었다. 사민정책을 써 조선의 영토 경계선을 명확히 하는 한편 김종서 다음으로 투입된 황보인은 이후 문종 시절까지 끊임없이 한양과 변경을 오가며 장성 쌓는 일을 감독했다.
 
백화 만발의 시대와 북방 개척의 시대를 이끌어왔지만 태종이 무풍지대로 만들어준 시대를 바탕으로 정쟁의 머리 아픈 정치 속이 아니라 본인이 하고픈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자아실현 단계의 왕이지 싶다. 늘 중국의 눈치를 보고 무주공산인 원래 조선땅이던 국경선을 명확하게 긋는 작업을 했으며, 그저 자손(18남 4녀)을 많이 낳기에만 빠빳던 세종. 본인이 겪지 않았기 때문에 자식들의 심리와 비극의 서막은 몰랐을 것이다.
 
M스토리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