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3년 12월 30일, 세종은 그의 인생 최고의 걸작품을 내놓게 되는데 표음문자인 '훈민정음'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훈민정음과 관련하여 단서가 될 만한 그 어떤 기록도 없으니 이는 사대외교와 기득권의 중국 한자 중심 문화에 반하는 내용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동안 훈민정음은 세종의 명을 받아 집현전의 학자들이 만들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3년 뒤 나온 <훈민정음해례본(해설서)>은 세종의 명에 의하여 정인지와 집현전 학자들이 편찬하였고, 이후 보급 과정에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이런 엄청난 일을 세종이 직접 혼자서 만들었다는게 믿기지 않으나, 실록에는 집현전이 창제에 관여했다거나 도움을 주었다는 내용은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창제한 날의 기록, <해례본>에도 세종이 직접 만들었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을 뿐이다.
1. 최만리의 상소
우리 조선은 지성을 다해 대국을 섬기어 한결같이 중화의 제도를 따라왔는데 언문을 창작하신 것을 보고 듣기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어찌 대국을 섬기고 중화를 사모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사오리까? 예부터 구주안의 풍토는 비록 다르오나 지방의 말에 따라 문자를 만든 예는 없사옵고 다만 몽고, 서하, 여진, 일본, 서번이 각기 자기 글자가 있으되 오랑캐의 일이므로 언급할 가치도 없사옵니다. 이제 언문을 따로 만드는 것은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오랑캐와 같아지려는 것입니다. 설총이 만든 이두는 비록 비루한 이언이오나 모두 중국의 글자를 빌려 사용하였기에 문자가 서로 분리된 게 아니옵고 이두를 쓰는 자는 문자를 알아야 하고 이두로 인해 문자를 알게 되는 이가 자못 많사옵니다. 사용한지 수천년 동안 장애가 없었사온데 어째서 상스럽고 무익한 글자를 만드십니까? 언문을 쓰게 되면 따로 문자를 배울 필요가 없으니 무엇 때문에 어렵게 성리의 학문을 하겠습니까? 언문은 ‘새롭고 기이한 기예’에 지나지 못한 것으로 학문에 방해되고 정치에 무익하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옳은 것을 볼 수 없습니다. 백성들이 글자의 착오로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경우가 있다하시나 중국은 말과 글이 같아도 그런일이 허다하옵니다. 언문을 굳이 만들어야 한다면 백관들과 의논하여 모두 옳다 해도 백세라도 성인을 기다려 의혹됨이 없은 연후에야 행할 수 있는 것이옵니다.
집현전의 실질적인 수장인 ‘최만리의 상소’ 내용으로 볼 때 집현전의 학자들이 도왔을 리가 만무하며 최만리의 상소가 당시 유학자들의 일반적 인식을 반영한 것이었다. 이를 알았기에 세종은 훈민정음을 직접, 비밀리에 창제 작업을 하였으며 문종과 둘째 딸인 정의공주, 수양, 안평 등의 대군이 도왔을 것이라는 추측이 정설이다.
2. 사대외교의 설움
세종의 카리스마가 통하지 않은 영역이 있었으니 그것은 중국과의 외교였다. 명나라에는 영락제의 등극으로 조 · 중 간의 갈등은 해소되었지만, 조선은 사대의 고통을 떠안게 되었다. 홍무제가 주변국에게 엄포로 일관하면서도 고립주의를 지향했다면, 영락제는 팽창주의의 화신. 북으로, 남으로, 바다로 중국의 힘을 뻗치지 못해 안달이었다. 정벌에 쓸 비용 마련을 위해 국내적으론 총동원령을 내리는 한편, 조선에도 전쟁 비용 분담을 요구하였다. 1423년 태종이 죽은 이듬해, 영락제는 북원 정벌을 위해 말 1만필을 요구하였다. 세종은 관마색을 설치하여 온 나라를 뒤져 말을 모으고, 한 번에 700여 필씩 수십 차례에 나누어 요동으로 보냈다. 다행히 영락제는 내몽고 원정 중에 죽고 손자인 선덕제가 즉위한다. 그런데 이 친구도 할아비가 하는 것을 보고 자라서 그런지 고약한 요구를 계속하여 왔다. 조선의 아름다운 여인들을 뽑아서 보내라는 것이었다. 영락제의 총애를 받았던 조선 여인으로 한씨가 있었으나 영락제가 죽자 순장을 요구받고 목을 매었다. 환관들이 선덕제에게 아첨하기를 한씨의 막내동생이 절색이라고 하여 뽑혀간 여인 또한 선덕제에게 총애를 받았다. 그의 오빠가 한확이며 나중에 세조와 사돈을 맺기에 이른다. 사냥 마니아였던 선덕제는 ‘해청(해동청)’을 잡아오기를 요구하였고 세종은 이러한 요구를 모두 들어주었다. 10여년 뒤 선덕제가 죽고 정통제가 즉위하면서 다행히 비정상적인 사대관계도 많이 정리되었다.
세종의 기본 중국에 대한 사대관계와 나라의 이념인 성리학 배경의 한문 중심의 사회에서 ‘훈민정음의 창제’야말로 가히 혁명적이라 말하지 않을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