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벅터벅 사색(史索) 중] “천년에 다시 없는 성군, 세종대왕”

M스토리 입력 2023.12.28 14:46 조회수 1,523 0 프린트
 

태종의 숙청을 통하여 무풍지대의 발판을 마련한 세종은 위로는 명에게 확실하게 사대외교를 펼치고 북방을 개척하는가 하면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과학혁명을 이끌어냈으며 음악을 정리하여 천년 문화유산의 기틀을 만들어낸 시기이다. 

1. 이중권력
난세를 헤쳐오며 당대의 영웅들을 모두 제압하고 권력을 차지한 태종은 52세의 이른 나이에 보위를 세종에게 물려주었다. 그러고는 군을 통제하는 병권과 관료의 임명 권한인 인사권은 본인이 가진 채 상왕의 신분과 힘을 유지하고 세종은 오로지 나라의 기틀을 만드는 일에만 전념하게 시켰다. 

2. 대마도 정벌
1419년 5월 왜구가 충청도 비인현에 침입하여 정박중인 병선을 불사른 다음, 상륙해서 읍성을 포위 공격하고 민가들을 약탈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은 며칠 뒤 황해도 해주 연평곶으로 몰려와 행패를 부렸다. 세종의 대처 능력은 여러모로 미숙했으나 태종은 달랐다. 바로 이종무를 3군 도제찰사로 삼고 병선 227척, 군사 1만 7,285명을 3군으로 나누어 대마도 정벌에 들어갔다. 처음 이종무는 대마도에 손쉽게 접근해 민가 2000여 채를 불사르고 저항하는 왜인 114명을 죽였으나 욕심이 슬그머니 올라 탐색전을 거지치 않고 대마도 깊숙한 곳에 토벌대를 보냈다. 그러나 갑자기 나타난 복병의 격렬한 공격에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줄행랑을 처야했으며 기세 등등한 왜인들은 포구까지 쫓아와 도망치기에 바쁜 180여명의 조선군을 죽이는데 남아 있던 부대들은 거의가 배 위에서 멀뚱멀뚱 구경만 하고 있었다고 한다. 처음의 승전보고 만으로 상을 받은 이종무는 이내 사실이 밝혀져 유배되었다. 

3. 집현전과 황희
태종 생존시에 이미 세종은 자기 시대를 끌고 나갈 쌍두마차를 마련했으니, 그것이 집현전과 황희 정승이다. 집현전은 고려 때부터 있었던 기관인데 유명무실한 상태로 세종 1년 좌의정 박은의 청을 받아들여 문신을 선발해 이듬해 본격 발족시켰다. 
 
 
황희는 양녕을 편들었다가 태종의 노여움을 사 지방에 쫓겨나 있던 상태였다. 그러나 다행이도 태종이 죽기 직전에 복귀를 허락해주어 예조판서로 임명되어 복귀 4년 만에 우의정에 임명되었다. 황희로 대표되는 노대신들과 집현전으로 대표되는 신진 학자 그룹을 양 날개로 삼아 세종은 자신에게 맡겨진 시대적 사명을 200% 완수하게 되었다.

태조는 터를 닦으시고 태종은 기초를 놓고 기둥을 세우셨다면 세종 본인이 할 일은 벽을 쌓고 지붕을 올려 문과 창을 내어 완성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실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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