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0년 태종에 밀려 태상왕이 된 태조는 하루아침에 사상적 동지였던 정도전과 사랑하는 아들들인 방석과 방번을 잃었다. 와병이 회복된 후 태종에 대한 원망이 나날이 커져가기에 이르렀다. 여행을 핑계로 소요산에서 금강산으로 다시 오대산으로 좀처럼 개경에 머무르려 하지 않았다. 태상왕이 가장 많이 머무른 곳은 소요산, 절 옆에 아예 궁을 지어 거처하였다. 그러나 날마다 부처를 대해도 분노는 사그라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1402년 늦가을 어느날 태상왕은 금강산을 유람하고 돌아오는 중국 사신을 임진강가에서 맞이해 잔치를 베풀었다. 이때 태종은 최정예 부대인 별시위를 보내 태상왕을 호위케 했는데 태종은 그 별시위를 돌려보내지 않고 눈물 작전을 통해 동북면까지 호송을 요구하여 태상왕을 계속 호위하도록 하였다.
태조·태종의 부자 대결
'조사의'의 난
안변부사, 조사의는 태상왕의 죽은 현비 신덕왕후의 친척이다. 1차 왕자의 난이 끝나고서 정도전 일당으로 몰려 하옥되었었다. 그러나 곧 사면된 것으로 보아 거물은 아니었다. 그가 신덕왕후의 복수를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동북면 주변 각 고을에 사람을 보내 합류를 독려했는데 호응이 커서 삽시간에 반군은 만여명에 가까운 대부대가 되었다. 의문점은 조사의는 중앙정계의 실력자도 아니고 이 지역의 기반을 둔 인물도 아니다. 명분으로 신덕왕후의 복수를 내세웠지만 신덕왕후 또한 개경 출신으로 이 지역에 연고가 없다. 그런데 각 고을 수령들이 앞다투어 합세하였다. 그렇다. 뒤에는 태상왕이 있었던 것이다. 태상왕과 독북면의 특수관계가 조사의의 난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조정은 이내 긴장감에 휩싸였다.
태종은 수령들을 설득시키기 위해 박순을 파견하였고 태상왕을 설득시킬 목적으로 이서와 설오대사를 보내는 한편 대규모 진압군을 편성하는 등 즉각적이면서도 다각적인 대응책을 내놓았다. 그러나 박순은 살해되고 이서와 설오는 반란군에 가로막혀 되돌아왔으며, 선발부대인 이천우 부대가 패하는 등 초기 대응은 실패로 귀결되었다. 이에 개경 수비는 민제에게 맡겨두고 태종이 직접 전장에 나섰다. 태상왕 또한 조사의와 합세하였다. 아버지와 아들의 전면전 양상이 된 것이다. 1차 왕자의 난이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반란이라면 이 싸움은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반란이라 하겠다. 전략가인 태종은 치밀하게 준비하고 전략적으로 행동하여 승리하였지만 전쟁영웅인 늙은 아비는 막연하게 거병하였다가 패하고 만다. 패배 과정은 허망하리만큼 시시했다. 조사의 진영에 포로로 잡힌 김천우란 자가 말하기를, “관군은 4만명이 넘는데 당해낼 수 있겠소이까?” 그날 밤 진중엔 김천우의 말이 안개처럼 퍼져나갔다. 하여 수십명의 도망병이 속출하더니 한 도망병이 진영에 불을 지른 것이다. 하룻밤 사이에 반군은 와해되어버렸다. 이로써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이른바 ‘조사의의 난’은 끝나버렸다. 실패한 반란군의 실제 영수인 태상왕은 평양에 머물러 있었다. 이제는 아들의 처분만을 기다려야 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태종은 태상왕께 개경으로 귀경하기를 요청드렸고 이 한달여의 외출이 그 유명한 ‘함흥차사’ 전설의 모티브가 되었다. 돌아온 태상왕은 아주 다른 사람이 되어 태종에게 이씨 사직의 천년지계를 부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