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3년 가을, 정도전은 한때 이성계와 함께 왜구와 여진족을 토벌하는데 함께 출정했던 정몽주로부터 그의 명성을 듣고 함길도 함흥에 있는 동북면도지휘사 이성계를 찾아갔다.
정도전은 부패한 관료로 인해 피폐한 백성들을 구제하고 도탄에 빠진 나라를 구하는 길은 오직 역성혁명밖에 대안이 없다는 결론을 짓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이성계의 군사력이 절실하였던 것이다. 당시 조우에서 정도전은 이성계 휘하의 정예 군대와 일사불란한 지휘통솔에 감탄을 금치 못하였고, 이성계 또한 정도전의 심오한 학문과 원대한 국가경영에 대한 경술에 감탄해 마지않았다.
1388년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잡게 되고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정도전은 자신이 품고 있던 이상세계를 실현할 수 있는 문 앞에 도달하게 되었다.
1. 재상이 중심이 되는 왕도정치(재상정치)
조선의 개국공신인 이성계의 아들들을 배제한 채 태조의 두 번째 부인인 신덕왕후의 막내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것이다. 태조의 첫 번째 부인 신의왕후는 남편이 왕이 되는걸 보지 못한 채 그만 죽고 말았다. 나머지 그녀가 낳은 자식들은 모두가 아버지를 따라 전장을 누볐는가하면 개국 과정에서도 나름대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개국 후 정실 왕후의 자식이라는 이유와 어린 세자를 교육시켜 재상이 중심이 되는 왕도정치(재상정치)를 꿈꾸던 정도전의 의지대로 비극의 씨앗을 심고야 말았다.
2. 요동정벌
명나라의 무리한 요구가 거세지자 정도전은 1396년 요동정벌의 방안으로 그때까지 각 지역의 왕실측근과 개국공신들이 사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사병을 모두 혁파하여 정규군으로 개편하는 사병혁파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해 4월 요동정벌 계획을 명나라에 설장수와 권근이 누설하였으나 병법과 진법 훈련을 강화하고 1398년 초 요동정벌의 준비를 마무리하였다.
정도전은 조선 건국의 장자방이자 일등 공신으로 그는 조선 정부의 형태와 조세 제도는 물론 법률 제도의 바탕을 만들었으며 불교에서 유교 중심의 중앙집권체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한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한양 시내의 전각과 거리의 이름을 직접 지었다.
그러나 세자 책봉과 한양 천도 과정에서 배제된 이방원과 무시당한 하륜의 결합으로 또다른 전개가 펼쳐지게 되었다.
1차 왕자의 난
1398년 5월 홍무제가 죽고 정도전은 사병혁파와 함께 요동정벌의 준비를 마치게 된다. 태조 이성계는 주요 공신들과의 술자리에서 모든 공을 공신들에게 돌리고 자손만대까지 기약할 것을 맹세하게 되었다. 팽팽한 긴장 속에서 숱한 고비를 넘겨 온 이성계와 정도전은 긴장을 풀어버린 것일까. 정적에 대한 경계를 늦추어 버렸다.
이방원은 좌절의 시기에 앞으로 다가올 재기의 순간을 위해 철저하게 준비하였고 본인과 부인을 중심으로 지속적으로 사병을 육성하였다. 정몽주를 제거할 때 보았듯이 이방원은 명분에 얽매이는 스타일이 아니다. 이방원은 처남들인 민무구, 민무질 형제, 이숙번, 이거이 부자를 필두로 하고, 사병혁파 때 감추어둔 무기를 바탕으로 궁궐을 장악하고 송현방에서 남은과 한가롭게 술을 마시고 있던 정도전을 제거하였다. 정도전이 무방비 상태로 술을 마시고 있음을 확인하고 거병한 쿠데타 군은 가장 먼저 적의 수뇌들을 제거하고 재상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 합법적 지휘체계를 구축한 뒤 궁궐 수비를 무력화시키고 대외명분으로 적장자인 정종을 왕으로 세운 다음 적당한 시기에 왕위를 물려받는다는 시나리오의 각본은 성공하게 되었다.
2차 왕자의 난
이후 정종과 그의 정비 정안왕후 사이에 소생이 없자, 세자의 지위를 놓고 방원과 방간(회안대군)은 또다시 미묘한 갈등에 싸였다. 이때 공신 책정문제로 방원에게 불문을 품고 있던 박포가 방간을 충동질하여 1400년 1월 방원과 방간 사이에 무력 충돌이 일어났고 개경에서 벌어진 싸움은 수적으로 우세한 방원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로써 왕자의 난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지휘 체계가 확고해진 방원은 1400년(정종 2) 11월 정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태종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