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맛바람라이더스의 치맛바람 휘날리며] 가을의 라이더

M스토리 입력 2023.10.19 14:23 조회수 3,681 0 프린트
긴 여름이 될 것이라는 소식이 무색하게 9월 1일이 되니 기온이 쓱 낮아졌다. 그렇게 9월 초에 잠시 가을인가 싶었던 순간이 무색하게 곧장 여름 날씨로 돌아왔다가, 작은 장마가 오며 쌀쌀해졌다가…  날씨가 오락가락하며 갈피를 잡기 어렵게 하지만 바닥에 떨어진 낙엽과 은행잎을 선두로 가을이 내가 왔다며 반겨달라 한다. 기후변화 때문인지, 한낮에는 아직 여름의 분위기가 남아있지만, 아침저녁으로는 차가운 공기가 치고 들어온다. 그늘을 찾아 헤매며 스로틀을 멈추면 안 되는 여름은 갔다. 반소매만 입고 탈 수 있었던 시기는 지나가 버렸다. 잠자고 있던 간절기 옷을 꺼내 옷걸이에 걸며 가을에 대해 생각한다. 안장 위에서 고개를 들면 새파란 하늘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깃털 같은 솜털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밀던 부드러운 하늘색은 더욱 깊은 파란색으로 바뀐다.
 

봄가을을 간절기라고 부르는 이유는 각각 온전한 계절이라기에는 너무 짧기 때문일까? 봄은 여름을 알리는 축제이지만, 가을의 라이더는 겨울을 선고받은 시한부가 된다. 점점 가까워지는 겨울로부터 도망치듯이 스로틀을 당겨도 완전히 도망칠 수는 없다. 가을이 지나는 것이 봄이 지나가는 것보다 더 아쉬운 이유일 것이다. 소중한 바이크를 아끼는 현명한 라이더들은 바지런히 쏘다니는 것으로 시즌 오프를 준비하기도 한다. 그들에게는 매 가을이 해의 마지막 라이딩 시즌이다.
 

겨울이 혹독한 서울에서 몇 번의 겨울을 나며 혹한에 익숙해진 탓일까? 남도의 한겨울은 그럭저럭 버틸만하다. 사실 한 번도 시즌오프를 해본 적 없는 나는 버틸 수 없더라도 버텨야 하는 입장이다. 시즌오프를 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이륜차를 대체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사륜차는커녕 면허조차 없고, 내가 사는 도시에서 이용할 수 있는 대중교통은 버스와 기차이다. 두 가지 다 배차 간격이 긴 데다가 막차 시간도 이르다. 택시는 어쩔 수 없을 때만 한 번씩 타는 마지막 보루로 남겨두고 있으니, 나에게는 바이크 두 대가 주 교통수단이다. CRF 250L는 20km 이상의 먼 거리를 갈 때 애용하고, 자이로 X는 출퇴근용이다.
 
 
두 대 중 메인은 물론 자이로 X. 50cc라는 치명적 단점에도 불구하고 출퇴근부터 장 보기용까지 여러 용도로 가장 즐겨 타는 바이크이다.
 
 
그런데 30년 된 내 고물 오토바이는 벌써 찬 공기의 변화를 느낀다. 이른 아침에 시동을 걸면 푸드덕하고 엔진이 꺼지려는 기미를 보인다. 속으로 ‘정신 차려~’라고 한마디 하며 예열 중 살짝 스로틀을 감아본다. 아직 9월인데, 기온은 떨어질 일만 남았는데 말이다. 이렇듯 종종 바이크가 나보다 먼저 기온의 변화에 예민하게 반응하기도 한다.

가을의 라이더에게 필요한 덕목은 긴장감을 늦추지 않는 것이다. 여름의 필수품인 구멍이 숭숭 뚫린 메시 글러브는 미리 세탁해서 넣어두고 간절기용 글러브로 바꾸는 것이 좋다. 외출 전, 창문으로 보이는 찬란한 햇빛에 정신이 팔려 여느 보행자들과 비슷한 옷차림을 하면 안 된다. 그대로 안장에 앉으면 점점 파고드는 가을바람에 온몸이 으슬으슬해질 것이다. 
 

끝이 가까워 보여서일까, 가을은 눈물겹도록 아름답다. 늘 다니던 길조차 필터를 씌운 것처럼 더 선명하고 밝아보인다. 바이크 사진을 찍으려다가 늘 익숙한 내 오토바이가 가을햇살 아래에서는 평소보다 더 예뻐보여서 흠칫 놀라기도 한다. 

오후 5시, 마지막 힘을 쥐어짜는 태양이 세상을 비출때, 저녁의 찬공기가 올라오기 직전의 이 시간대가 가장 좋다. 세상이 가장 아름다워 보이는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하늘빛에 점점 붉은빛이 더해지면 해가 지기 시작한다는 신호. 때로는 잠시 바이크를 세우고 멍하니 노을을 바라보아도 좋다. 
 

은행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은행, 이미 바닥으로 떨어진 진한 노란색의 열매, 타이어에 밟혀 도로와 한 몸이 된 은행 자국. 시각적으로는 높은 하늘, 촉각적으로는 시원한 바람이 가을의 상징이라면 후각적인 가을의 상징은 단연 은행이다. 타이어에 마구 짓이겨진 도로의 한편에서는 늘 꼬릿한 냄새가 풍긴다. 코를 막고 인상을 쓰며 지나가는 사람이 보이지만 나는 어째서인지 이 은행 냄새도 가을 풍경을 완성해 주는 중요한 요소처럼 느껴진다.

가을이 주는 느긋하고도 쓸쓸한 분위기와 함께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은 조만간 옷을 패스츄리처럼 겹겹이 껴입어야 하는 겨울이 온다는 징조이지만, 당장은 그 차가운 진실을 잊어버리고 현재를 즐기는 편이 좋다. 잔혹한 계절은 생각보다 빨리 다가오니까.  
 
    by. 노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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