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 바이크를 좋아하는 나는, 올드 바이크를 좋아하면 안 되는 사람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당당하게 밝힐 것은 아니지만 아주 솔직해지겠다. 나는 예방정비도 게을리하고 주기적으로 바이크를 살펴보는 경우도 거의 없다. 공기압조차도 가끔 생각이 나면 넣는 식이라 ‘에어가 없는데 도대체 어떻게 타고 다닌 거냐?’는 말을 듣기도 일쑤다. 그저 바이크라 하면 시동이 켜지고, 기름이 충분하고, 앞으로 나가는 것에 만족한다. 엔진오일을 교체하러 간 센터에서 미케닉에게 ‘사실 오일이 거의 남아있지 않아서 이건 교체가 아니라 보충에 가까웠어요.’라는 얘기를 들어도 허허 웃고 말았다.
이렇게 평소에 관리를 안 하는 사람에게 주행이 가능한 선에서 확연히 느껴지는 이상 증상의 발견은 차라리 행운이다. 그 핑계 삼아 센터에 가서 살펴보고 다른 문제를 발견하기도 하니까. 하지만 나의 경우 바이크들이 합세해서 작전이라도 짰던 것 같다. 저 인간에게는 큰 문제를 한방에 터트려서 충격 요법을 주어야 한다고 말이다. 주행 중 바이크의 시동이 꺼지는 것. 그리고 시동이 다시 걸리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라이더에게 꽂아 내려진 날벼락이다. 내가 타는 모든 바이크에서 적어도 한 번 이상씩 이런 날벼락을 맞았다. 충격 요법이 통하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
멈춘 자이로를 두고 숙소에 가기 전
자이로 X를 데려온 지 한 계절을 겨우 넘겼을 때, 나는 바이크를 제주로 보냈다. 자이로가 트럭에 실리고 몇 시간 뒤 나는 비행기를 타고 한 시간여 만에 서울에서 제주 땅을 밟았다. 자이로를 실은 트럭이 항구에 도착해서 배를 타고, 다시 트럭을 타고 제주의 숙소 앞까지 배달이 오기까지는 3일이 걸렸다. 고된 여행에 앞뒤로 찌부가 된 자이로는 계기판 쪽 카울이 뒤틀어지고 후미등 커버가 깨졌지만, 용달에 보내기 전과 직후, 사진을 찍지 않아서 보상을 받아내지도 못했다. 2020년, 얼굴이 약간 뒤틀어진 자이로를 타고 한여름의 섬에서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이며 2T 올드바이크를 마구 괴롭혔다. 그 벌을 톡톡히 받은 것은 여행의 반이 지났을 때였다. 제주의 동쪽인 세화에서 서쪽인 애월까지 하루 만에 이동한다는 계획은 처음부터 무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나지 않는 계획을 바꿀 수 없는 모종의 이유로 인해서 어쩔 수 없었다. 물론 제주도의 허리를 가로질러 가면 더 가깝다. 하지만 '516대로'나 '1100대로' 같은 제주도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큰 대로들은 50cc 스쿠터로는 가기 어렵다. 차들이 쌩쌩 달리는 곳이라 스쿠터 렌트 샵에서는 ‘그 도로로 가면 보험처리 안 해줌’ 같은 치사한 정책을 내놓기도 하는 악명높은 곳이다. 그곳을 피하기 위해서는 시계 반대 방향으로 움직여서 제주 시내를 통과해야 했다. 약 50km의 여정 중 절반에 해당하는 제주시에 도착해서 가장 시내다운 프랜차이즈 카페에 들어갔다. 시골에서 겨우 2주 지냈을 뿐인데 벌써 시내가 이리 반갑다니 안될 일이다. 동그란 펄이 가득 든 밀크티를 받아 들고 자리에 앉았다. 별로 피곤하지도, 쉬고 싶지도 않았지만 이건 라이더를 위한 휴식이 아닌 바이크를 위한 휴식이기 때문에 인내했다. 한 시간도 안 되어 카페를 나와 다시 안장에 올랐다. 애월에 진입한 뒤로부터는 야트막한 오르막이 많아 안 그래도 느린 바이크가 더 답답하게 느껴진다. 이정도면 거의 뛰는거랑 똑같겠다 싶을 정도로 속도가 나오지 않는다. 이 정도면 거의 뛰는 거랑 똑같겠다 싶을 정도로 속도가 나오지 않는다. 의아해하며 오르막에 진입할 때마다 스로틀을 더 한껏 당겼다. 그런데 갑자기 자이로가 털털거리더니 시동이 꺼졌다. 다시 시동을 걸었다. 몇 초간 유지가 되나 싶었는데 스로틀을 당기니 곧바로 픽하고 꺼진다. 일단 도로의 흰색 선 옆에 바이크를 세우고 기다려 본다. 30분쯤 기다렸는데도 여전히 시동이 켜지지 않기에 캠핑 의자를 꺼내 조립한 뒤 바이크 옆에 앉아 책을 읽었다. 책을 읽다 배가 고파서 짐 속에서 빵을 꺼내 먹었다. 어느새 두 시간여가 흘렀다. 여전히 시동은 걸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가망이 없다는 걸 깨닫고는 의자를 착착 조립해 가방에 넣었다. 짐대에 묶인 짐 끈을 풀고 캐리어와 지팡이를 챙긴다. 당장 필요하지 않은 짐은 다시 짐대에 단단히 묶는다. 숙소까지의 거리는 1.5km. 충분히 걸어갈 만한 거리이다. 이제는 한숨도 나오지 않는다. 다행인 건 나는 아직 내가 웃기다. 덤덤하게 ‘멈추면 뭐 두고 가야지’ 하는 내가 너무너무 웃기다. 킥킥 웃으며, 친구들에게 ‘나 바이크 멈춰서 숙소까지 걸어가는 중 ㅋㅋ’하는 카톡을 보내며 숙소에 도착하니 주인이 ‘걸어오셨어요?’ 하고 묻는다. ‘아…. 네….’하고 상황 설명을 생략하고 싶었는데 버스도 안 오는 여기까지 걸어왔다는 게 어떻게 된 일인지 너무 궁금하다는 눈빛을 피하지 못하고 사실을 술술 불어버렸다. 근처에 식당도 편의점도 없는 곳이라 이동 수단이 없으면 끼니를 어떻게 때우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숙소 내 식당이 문을 닫기 직전. 라면을 시켜 먹고는 방에 돌아가 짐을 푼다. 샤워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잠시 여독을 풀었을 뿐인데 벌써 한밤중이 되었다. 이 정도면 바이크가 식었을 것 같은데.. 아예 엔진이 붙어버린 게 아니라면 일시적인 과열 현상이라면 지금 시동을 다시 걸어볼 만하지 않을까? 산책 겸 바이크가 잘 있나 확인한다는 핑계로 일단 깜깜한 도로를 30분 넘게 걸어 자이로에 갔다. 다행히 바이크는 짐 하나 없어지지 않은 채 두고 간 그대로 잘 있다. 키를 꽂고 조심스레 시동을 거는데, 시동이 걸린다. 뭔가 시원하게 걸리지는 않지만 지금 시동을 꺼트리면 다시 걸리지 않을 것만 같이 마음이 급하다. 허겁지겁 헬멧을 쓰고 스로틀을 당겨 순식간에 숙소로 돌아왔다. 바이크를 타면 이렇게나 가까운 거리였구나.
무사히 숙소로 돌아온 이후로 몇 군데의 센터에 들러 이상증세를 설명하고 수리를 원한다고 했지만 전부 거절당했다. 남은 여행 기간에는 묘하게도 자이로는 쌩쌩해 달려주었고 여전히 무엇이 문제였는지는 확실히 알지 못한다.
이게 처음으로 도로에서 바이크가 멈췄던 일이다. 다음 편에서는 다른 상황, 다른 기종을 타다가, 각자의 다른 이유로 시동이 멈춘 몇 번의 경험을 더 기록해 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