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맛바람라이더스의 치맛바람 휘날리며] 그때의 즐거움

입력 2023.09.01 16:44 조회수 2,402 0 프린트
 
나는 평생 모든 일을 미루면서 해왔다. 매일매일 청소도, 숙제도, 즐거운 모든 일들도 나중에 할거라며 미뤄왔다. 짧게는 5분 뒤로 미루고, 길게는 평생을 미루고 있다. 고등학생 때에는 시간이 없으니까, 대학생 때는 지금 다른 일을 하고 싶으니까, 등의 대충 둘러대는 이유로 그때 해야 하는 일들을 죄다 미뤄왔다. 왜 항상 할 일은 많고 시간은 없고 나는 뭐 때문에 이렇게도 바쁜지. 무언가를 한번 미루기 시작하면 지금이 아니면 안 되는 일까지 미루고, 또 미루게 된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을 때가 되어서야 ‘업보 청산 데이’를 선언하고 온갖 일들을 닥치는 대로 해내며 허덕이는 순간이 반복된다.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는 있지만 미루는 것을 멈출 수가 없다. 하지만 미뤄왔던 즐거움이 후회로 돌아오는 순간 느꼈다. 아, 뭔가 단단히 잘못됐다는 것을.
 
 
지난 겨울 동안 바이크를 타는 둥 마는 둥 하다가 3월이 되고서야 정비를 맡기고, 다시 안장 위에 올랐다. 주차장 한구석에서 먼지만 쌓여가던 바이크를 꺼내서 작년부터 미뤘던 세차도 하고 나니 봄맞이가 끝났다. 코끝을 스치는 바람이 몇 주 전처럼 날카롭지 않음을 느끼면서 스로틀을 당기고 이리저리 쏘다니기다가 여느 때처럼 북악으로 향했다. 평일 낮의 도로는 한적했고 도로 위에 차도 거의 없어 즐겁게 코너 길을 올랐다. 하지만 뭔가 마음 한구석에서 묘한 마음이 피어올랐다. 뭘까? 왜 예전만큼 바이크를 타는 일이 즐겁지 않을까? 가끔은 바이크를 타는 게 귀찮고 어떨 땐 바이크를 탄다는 선택지조차 생각나지 않아버리는 걸까? 왜 그때처럼 즐겁지 못한 걸까?
 
 
바이크를 처음 타게 됐을 때 내 세상엔 정말 바이크뿐이었다. 그때는 이제 추워질 일만 남은 11월, 고등학생 내내 모아온 돈 60만 원으로 시티 100을 사서 롱패딩에 장갑 하나 끼고 추운 줄도 모르고 여기저기 잘만 쏘다녔다. 신발만 신으면 무조건 바이크를 탔었던 그때에는 연비가 40쯤 나오던 바이크를 매일 주유하는 게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일주일에 서울 내에서만 몇백 킬로를 타고 다녔다. 안장 위에 오르면 세상이 달라 보이고, 자신감이 넘쳤다. 고작 바이크 한 대에 정말 다 가진 듯했었다. 바이크에 익숙하지 않고 운전도 이제 막 시작해서 하루에도 몇번씩이나 곤란한 일투성이였는데도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 않았는지. 어제는 신호대기 중에 시동이 꺼지고, 오늘은 비탈길에서 넘어지고. 돌이켜보면 하루하루가 도전이었는데, 그게 도전인 줄도 모르고 척척 매일을 살아냈다.

그러나 그때에도 미루는 성정은 그대로였기에, 또 모든 것을 미루곤 했다. 거절한 투어와 밤 바리, 라이딩 제안이 얼마나 아쉬운지. 왜 그때 더 많이 타고 더 멀리 가고 더 오래 타지 않았는지. 왜 또 같은 기회가, 같은 시간이, 같은 순간이 돌아올 거라고 확신했는지. 어떻게 인생에 매번 바이크를 처음 탈 때와 같은 즐거움과 흥분이 계속 나를 찾아올 거라고 그렇게 굳게 믿을 수 있었는지. 후회가 가득하다. 요즈음 바이크를 타며 생각한다. 그때처럼 어려움도 즐거움으로 느끼는, 해결해야 할 수많은 현실적인 문제들이 그저 내가 당연히 해결해낼 수 있는 게임 속 퀘스트들로 느껴지는 일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지.
 
 
한동안 서울을 떠나서 있게 됐는데, 이전 같으면 목적지가 제주도일지라도 바이크를 타고 갈 궁리를 하고 갖은 애를 써서(그게 노력하고 있는 것인 줄도 모른 채) 결국 타고 갔을 텐데 지금의 나는 그냥 기차표를 예매했다. 물론 출발하기 전날까지도 고민했지만, 바이크를 타는 선택을 감당하기 위해 내가 노력해야 하는 수많은 것들을 생각하니 예전처럼 쉽게 안장 위에 오를 수 없어졌다. 어쩐지 너무 슬퍼졌다. 지난 몇 년간 바이크는 정말 내 삶의 전부였고, 매일매일을 바이크를 타고 도로 위에서 이리저리 쏘다니며 수많은 일을 해왔는데. 이제는 수많은 선택지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는 게, 그리고 이게 누군가의 계략이 아니고 그저 가랑비에 젖듯 시간에 젖어 내가 변해버린 결과인 게.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바이크를 타며 10년 치 즐거움을 한 번에 당겨쓴 것 같다고. 인생에 다시는 그런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때 만난 친구들과도 종종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그때 우린 단체로 좀 미쳐있었던 것 같다고. 바이크에 홀렸던 것 같다고. 바이크가 뭐라고. 털털거리는 엔진에 두 바퀴가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느껴졌을까. 더 이상 바이크를 처음 탔을 때처럼 모든 일이 즐거움으로 다가오는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바이크는 계속 타겠지 싶다. 아직은 내게 중요한 것 중 하나이기에. 나를 소개할 때 바이크 없이 소개할 수 없을 만큼 나의 일부라고 생각되니까. 그러나 이제는 그때의 즐거움은 그때의 것이고, 지금은 지금의 즐거움이 있을 거로 생각하며 어디서 오는 것인지 모를 슬픔을 달래본다. 언젠가 바이크만큼 거대한 즐거움을 찾아낼 수 있기를 바라며. 
                  by. 채린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