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수 시인의 문화 산책] 색 속의 색

M스토리 입력 2023.07.03 13:25 조회수 1,810 0 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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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일생을 색 속에서 살고 있다. 나는 어떤 색으로 살고 있는가?

『어떤 색상을 찾으시나요?』

아내가 백화점에 갔을 때, 점원이 물었다. 아내는 묵묵히 이 옷 저 옷을 만져만 볼 뿐 바로 결정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이미 아내가 어떤 색깔의 옷을 고를 것인지 잘 알고 있다. 아내는 분명 딸이 좋아하지 않는 한물간 색깔의 옷을 고를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선호하는 자기만의 색이 있다. 하지만 솔직히 나는 내가 무슨 색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마치 내 냄새를 내가 맡지 못하는 것처럼. 고동색이나 검은색 계통의 옷을 주로 입고 다닌다는 것만 어렴풋이 인지한다. 그렇지만 누군가 나에게 좋아하는 색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고동색과 검은색이라고 당당히 말하지 못한다. 왜 그럴까?

초등학교 시절 미술시간에도 나는 옆자리에 앉은 아이가 칠하는 색을 슬쩍 넘겨다보며 칠했었다. 그 아이는 하늘색을 하늘에 칠했고 산은 높고 푸르게 냇물과 사람은 검은색을 칠했다. 나도 하늘에 하늘색을 칠하고 산도 높고 푸르게 칠했다. 그리고 우리 동네 미군부대 검둥이 병사를 생각하며 얼굴도 검게 칠했다. 하지만 냇물색은 그 아이처럼 검게 칠하지 않았다. 잠시 손을 놓고 『너, 왜 냇물을 검게 칠했냐?』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 아이는

『우리가 살던 동네는 다 그래.』 하고 가볍게 대답했다.

그 아이는 탄광촌에서 전학 온 아이였던 것이다.

그 이후, 대학에 다니던 시절에는 그 탄광촌 아이처럼 검은색을 좋아했던 것 같다. 검은색 바지에 검은색 점퍼, 마음도 시커먼 색. 그런데 미술과에 다니는 친구는 좀 달랐다. 그 역시 검게 물들인 군용잠바를 입고 작업을 했는데 그의 작업실에 여기저기 널린 캔버스가 온통 흰색으로 도배된 것을 보았다. 하여 무엇을 그린 것이냐고 물었더니 그 친구는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이 요즘 <흰색에 갇힌 것 같다>고 넋두리를 늘어놓는 것이었다.

당시엔 그의 작품과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좀 세월이 흐른 뒤에 어느 잡지책에서 피카소의 <청색시대>와 <장밋빛시대> 작품을 보고서 혹시 그에게도 피카소처럼 색에 대한 천재성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추측을 해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나름 침울한 <백색시대>를 지나고 마침내 <장밋빛시대>를 맞이했다고나 할까! 대학졸업 후 몇 년간 고등학교에서 후학을 가르치다 슬그머니 영국 유학을 다녀와서 어느 큰 도시의 미술관 관장이 되었던 것이다.

색(色)이란 말은 빛색, 광택, 꼴, 태, 용모의 의미로 쓰이긴 하지만 주로 여성(女性) 성과 관련된 여색(女色)이란 말로 품격의 낮은 단계에서 자극적으로 쓰이곤 한다.

하지만 성인(聖人)들은 품위 있게 쓰기도 한다. 예를 들어 어색(漁色)이란 한자어는 ‘여색을 탐하다’라는 의미인데 예기(禮記)에 보면 제후불하어색(諸侯不下漁色)이란 문구가 있다. 이는 ‘왕과 제후는 여색을 좋아한다’라 해석되는데 통치자들은 도덕적으로 주의해야한다는 경구라 하겠다. 또 맹자(孟子)에도 과인호색(寡人好色)이란 문구가 있다. 직역하자면 ‘과인(임금)은 색을 좋아하는 사람’이란 뜻이겠지만 그 역시 ‘정치를 잘 하려면 여색을 경계하라’는 정치인에 대한 윤리적 조언이 아닌가싶다.

반야심경(般若心經)에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란 구절이 있다. ‘색(色)은 곧 공(空)이요, 공은 곧 색이다.’ 색은 만물 곧 물질적 삶을 의미하고 공은 그 물질적 삶과 함께하는 숭고한 정신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색과 공의 조화랄까? 그 속에서 우리는 추우면 옷을 입고, 배가 고프면 음식을 먹고, 꿈같은 그림을 그리며 눈에 보이지 않지만 따스하게 느낄 수 있는 인정을 서로 나누며 분별없이 사는 게 아닌가!
또 다른 색(索)이란 말도 있다.

‘색(索)은 노(노끈), 바(밧줄), 새끼(새끼줄)’란 뜻과 ‘다할’, ‘다 없어짐’의 뜻도 있는데 그 색으로 만들어진 한자어에 ‘사색(思索)’이란 말이 있다. ‘생각을 묶는다’ 또는 ‘생각을 다하여 아무 것도 남김이 없는 상태’ 곧 ‘무념’을 의미하는 것이라 한다. 하지만 나는 색(索)의 또 다른 해석의 말인 ‘찾음’ 혹은 ‘뒤지어 살핌’의 의미를 선택하고 싶다.

일상의 생각을 살피는 것, 그것이 곧 사색하는 단정한 모습이요 내 명상의 출발이기에 그렇다.

어느덧 성하(盛夏)의 계절이다. 산하에 녹음이 짙다.

녹음(綠陰)의 색은 눈과 정신을 맑게 한다고 한다.

미술시간에 만난 그 탄광촌 아이는 시원시원하게 짙고 푸르게 높은 산을 그리곤 했다. 그 아이의 진지한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삼삼하다. 나는 왜 그 아이처럼 시원시원하게 색칠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 아이는 지금 어디서 어떤 색을 칠하며 살고 있을까?

오늘도 어제처럼 아침 일찍 가로수 길을 걷는다. 무채색 빛 사무실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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