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시감(旣視感, deja vu)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다. 최근에 내가 우연히 가게 된 곳이 내가 언젠가는 갔어야 할 곳, 혹은 가게 될 곳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운명’이란 말이 더 적절할 것 같다.
나는 요즘 Y시에서 홀로 생활을 하고 있다. 기업의 지방이전 정책으로 인해 직장이 서울에서 Y시로 이전하여 한동안 출·퇴근버스를 타고 다녔는데, 새해 들어 근무처가 군 소재지 출장소로 바뀌게 되어 부득이 사무실 인근아파트(원룸)로 이사 아닌 이주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여 생각지도 않게 주말부부가 된 탓에 아내는 매주 미련하고 솜씨 없는 남편을 위해 반찬 장만해 주랴, 빨래해주랴 수고가 많다.
친구들은 그런 나를 보고 ‘이제 진정 자유를 얻었다’느니, ‘전생에 나라를 구해서 복이 터졌다’느니 듣기 민망한 소리로 위로 아닌 위로를 해주곤 한다. 그렇다고 고달픔과 외로움이 줄어들까만 주변에 나와 같은 처지의 지인들 소식을 듣게 되면 ‘시절이 그런가 보다’하고 애써 기분을 달래볼 뿐이다. 아직은 적응이 잘 안 돼 안정을 찾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그래도 내가 옛날에 태어나지 않은 것만은 다행이지 싶다. 만약 유목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어찌할 뻔 했는가? 하늘의 별을 보며 새 목초지를 찾아 한밤중에 대륙을 횡단해야 했을 것이고, 하늘이 훤히 내다보이는 천막에서 양떼와 함께 추위를 견디며 잠을 자야 하지 않았을까? 가까운 조선 시대 때만 해도 그렇다. 집에서 먼 임지에 발령이 나면 객지에서 혼자 온갖 궂은일을 다 해가며 살림살이를 해야 했을 것이 아닌가?
물론 전혀 입장이 다른 경우의 사람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가령 특정 종교인은 수행을 하기위해서 오히려 혼자 지내야 하고 구름처럼 이곳저곳으로 수행처를 옮겨 다니는 운수행각이 일상이었을 테니 말이다.
조선 건국의 정신적 지주인 무학대사도 그 가운데 한 분이었을 터, 하여 전국을 떠돌며 사찰을 창건하거나 중창을 하다 원주 구룡사에 잠시 머문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가 남긴 시를 한 수 살펴보면 한 가닥 의미가 짚일 것 같다.
<치악산>
뱀이 죽자 치악의 맑은 하늘로
(蛇沒雉岳兩鮮空 사몰치악양선공 )
크고 작은 종소리 4경에 울려 퍼졌네
(大小磐音四更中 대소반음사경중)
꿩과 뱀 두 원혼이 밤새 풀려버렸나니
(雉蛇兩寃半宵鮮 치사양원반소선)
무착스님 비로소 보은의 종소리임을 알았네
(正知無着報酬鐘 정지무착보수종)
이 시는 <치악산>이란 이름이 만들어지게 된 전설을 소재로 하여 무학대사가 유일하게 남긴 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空) 사상을 통해 전하며 당시의 여말선초의 시절 운세와 관련하여 원한을 다 풀고 백성의 행복한 삶의 지침을 제시해준 명쾌한 선시가 아닐 수 없다. 나 역시 무학대사처럼 지고하지는 못하지만 뜻밖의 일이 없지는 않았다.
하루는 새로이 이주한 아파트에 짐을 풀고 출장지 사무실 주변 환경을 살피느라 돌아다녀보게 되었는데 이정표에 적혀있는 마을이름이 낯설지가 않았다. 기시감이라고나 할까, 마치 언젠가 다녀봤던 곳을 다시 온 것 같았다. 수암리, 돌모루, 숯골. 그 가운데 특히 숯골이란 마을 이름이 내 눈을 찌르고 들어왔다. 어린 시절 가끔 어머니가 들려주신 옛날이야기 가운데 숯골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는데 바로 그 숯골은 구룡사에서 가까운 선친의 고향 마을 이름이었던 것이다.
하여 그날로 누나들에게 전화를 걸어 선친의 삶의 궤적을 재확인했고 점심시간에 함께 근무하게 된 직원의 자전거를 얻어 타고 고개 너머에 있는 선친의 고향마을을 찾아가보았다.
집성촌 마을은 봄빛으로 화사했고 마치 나를 환영한다는 듯 집집마다 대문이 활짝 열려져 있었다. 허나 모두 밭일을 나갔는지 아무도 보이지 않아 마침 길을 지나는 주민이 있어 물어보았더니 어른들은 다 돌아가시고 자손들도 대부분 대처로 이주해 가서 몇 집 남아 있지 않다고 했다. 그래도 문패에서나마 같은 성씨를 발견하고 보니 왠지 가슴이 벅차오르며 신선한 환희심이 솟았다. 의미야 어떻든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란 말이 생각났고 내 눈엔 분명 모든 게 신기하고 새롭기만 했다. 마을길도 개울물도 나뭇가지도 햇살까지도 반갑고 다정하게 느껴졌다.
마치 나의 다정한 동학(同學) H가 강원도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나 C시에서 학교를 다니다 경상도 D시에서 사범대학을 마치고 아버지의 고향 서귀포로 발령받아 가서 아버지가 남겨주신 귤밭의 귤나무를 바라보던 날처럼 또, 소설 ‘뿌리’의 저자 알렉스 헤일리가 미국을 떠나 할아버지 쿤타킨테의 고향인 아프리카 땅을 밟고 그곳 사람들을 만났을 때 느꼈을 것 같은 운명적 감동이랄까. 마을을 지나 선친이 어린 시절에 걸었을 오솔길(지금은 확장된 농로)도 걸어보았다.
문뜩 단상 한 소절이 내 손을 잡아주었다.
<미루나무>
천 년 전에도
천년 후에도
그렇게
까치가 울다 떠나간
미루나무는
평생
들길 끝에 서서
적연(寂然)히 기다린다
아직 울지 못한 까치를
그리고 길을 걷다가 선친이 물장구치며 놀았을 개울가에도 다가서서 개울물을 들여다보았다. 개울물 속에 비친 얼굴이 어릿어릿 물속에서 나를 내다본다. 흐르는 물결 탓에 일그러졌다 펴졌다를 반복하는 얼굴 모양 속에 선친의 네모난 얼굴도 어슴푸레 들여다보인다. 눈, 코, 입술…… 사진으로 본 아버지를 이제 비로소 만나는 것만 같았다.
그 순간, 어느 스님의 선시(禪詩)도 한 구절 뇌리에 떠올랐다.
<저것은 나이지만, 나는 저것이 아니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