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진왜란(1592.4)이 일어나고 조정을 나눈 '분조'를 맡아 남쪽을 지킨 광해군의 선전으로 선조는 죽을 때까지 광해군을 시기와 정적의 대상으로 여겨 왕위를 계승하는 것을 거부해왔다. 선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광해군은 왕위에 오르고 왕권 강화를 위해 내부적으로는 많은 옥사를 일으키고 외부적으로는 사대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명과 후금에 대하여 중립적인 외교정책을 펼치게 된다. 하지만 계속되는 옥사로 궁지에 몰린 세력들은 반정을 일으키게 되고 마침내 인조반정은 성공하게 된다.
반정에 성공한 인조(1623~16 49)는 “광해군과 반대로”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기존 중립적인 외교정책에서 친명배금 정책을 추진한다. 후금은 광해군 시대의 외교를 거듭 요청하였으나 인조는 거절한다. 후금은 1627년 정묘호란을 일으키게 되고 3만군사가 황해도까지 침입하자 인조는 후금과 형제의 관계를 맺게 된다. 그래도 명에 대한 사대주의가 계속되자 1636년에는 병자호란을 일으키게 되고 군신관계를 요구하며 12만 군대가 홍이포를 앞세워 파죽지세로 한양까지 점령한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게 되고 45일간의 항전이 있었으나 마침내 청나라 황제 태종(홍타이지)에게 삼전도의 굴욕을 겪게 된다. 삼배구고두(세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의 예를 갖추게 되며 인질로 소현세자를 청나라로 보내게 된다. 민심은 나라를 망하게 하고 백성을 도탄에 빠트린 인조를 원망하게 되고 인조의 죄업으로 고생하는 소현 세자에 대해서는 동정이 앞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인질 생활을 통한 외교정책의 성공과 조선 포로들을 규합하고 민심을 달래는 것에 성공한 소현세자의 귀국은 인조로서는 반가웠을 리가 없다. 일련의 과정은 소현세자에 대한 인조의 의심과 질투심이 자라 제거해야 할 가장 큰 정적으로 부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소현세자의 죽음 뒤에 세자빈 강빈은 인조의 음식에 독약을 넣었다는 모함으로 사사되게 되고, 아들들은 제주도로 유배되어 죽음을 맞이하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영화에서 강하게 기억에 남는 한 장면을 꼽으라면 이형익이 소현세자를 죽이려고 독침으로 시침할 때, 양눈, 코, 입에서 피를 흘리며 신음소리를 내고 있는 소현세자가 애타게 경수를 쳐다보고 있었고 마침 초가 다되어 촛불이 흔들리며 꺼지는 것과 동시에 앞이 보이게 된 경수와 눈이 마주치는 장면이 가장 인상 깊었다.

함께 봐서 좋을 영화는<광해>, <남한산성>, <최종병기 활>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