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맛바람라이더스의 치맛바람 휘날리며] 한여름의 안장 위에서

M스토리 입력 2022.08.16 17:41 조회수 2,545 0 프린트
 

여름 하면 생각나는 작열하는 태양과 달리 장마 때문에 일주일 내내 비가 오는 우리나라의 한여름은 바이크를 타기엔 너무 감수해야하는 것이 많다. 장마 기간에 잠깐 동네 바리를 다녀오고 싶어도 바이크를 타려니 번거롭게 우비를 입고, 또 젖은 우비를 벗고, 집에오려면 다시 젖은 우비를 주섬주섬 챙겨입어야 한다. 이런 과정을 생각만 해도 벌써 열 번은 나갔다가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냥외출을 포기하게 되곤 한다. 그렇다고 걸어서 나가자니 비 오는 날 우산을 들고 물웅덩이를 피해 종종대며 걸어 다니는 일이나 붐비는지하철, 버스에서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우산들 사이에서 젖지 않기 위해 옷자락을 갈무리하며 끼어있을 것을 상상만 해도 그냥약속이고 출근이고 모두 포기하고 싶어진다.

계속되는 비가 그치고 해가 쨍쨍해진 날이면 상황이 나아지는 듯 아닌 듯 하다. 해를 받고 이글이글 달궈진 안장에 맨살이 닿으면 이게바로 고사양 바이크에나 있는 열선시트인가 싶다. 구름 한 점 없는 그림 같은 하늘 밑에서 헬멧을 쓰고 그릴, 아니 안장 위에 오르면‘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조각 그늘을 찾아 헤매게 된다. 태양이 나를 살해하려는 게 틀림없다 싶은 정도로 해가퍼붓는다. 차선이 왕복 8개쯤 되는, 가로수나 표지판 그늘에 숨을 행운조차 없이 교차로에서 기약 없이 신호대기를 할 때는 내 검정헬멧에 물을 뿌리자마자 곧바로 치이익하며 증발해버리는 상상을 하곤 한다. 운이 안 좋아 버스의 옆이나 앞에서 신호대기를 하고 있을때면 거대한 드라이기 옆에서 최고 세기의 바람을 맞고 있는 기분이다. 전기버스의 보급화를 이렇게까지 바라게 될 줄이야.

달리면 한결 나을까 싶다가도 불어오는 바람마저 후끈해 버리니 그냥 신호에 걸리지 않고 재빨리 목적지에 도착하기를 바라는 간절한마음으로 스로틀을 당기는 수 밖엔. 다리 사이에서 폭발하고 있는(정말로!) 엔진의 열기는 한여름의 후덥지근한 바람으로날려버리기에는 너무 강렬하다. 요즘 타는 바이크가 100cc의 작은 엔진이라 망정이지, 이전에 250cc의 바이크를 탈 땐 반바지를 입고맨다리를 노출할 바엔 차라리 긴바지를 선택했을 정도로 엔진 열의 존재감은 강렬하다.

너무 불평만 했나? 사실 뙤약볕에서 헥헥대며 운전하기를 매일같이 해도 여름을 싫어하는 일은 쉽지 않다. 여름의 하이라이트는 밤에있기에. 기나긴 낮이 지나고 느지막이 해가 지고 난 뒤, 지면에 잔열이 남아있어 아직 산책하기엔 후끈거리는 늦은 저녁이 시작된다. 이때 북악산이나 남산 소월로처럼 나무가 많은 곳으로 들어가면 흐르는 냉기가 차분히 나를 반겨주는 듯하다. 조금 웃기기도 하다. 주변이 불탈 땐 기운이 쪽 빠지다가 조금 시원해지면 오히려 신이 나서 스로틀을 신나게 당기게 되니까.

북악 스카이웨이를 가기 위해 사직터널을 지나 고가 위로 오르면 서늘한 기운이 훅 끼쳐온다. 한여름의 밤이 아니라면 반소매는무리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차갑다. 터널 하나 지났을 뿐인데 온도 차이가 이렇게 크다니. 낮 동안 볶아지던 기억이 흐려질 정도로짜릿한 느낌이다. 북악산 초입에 들어서면 한 차례 더 온도가 낮아진다. 그렇게 더위가 피해 가는 곳에서 삼삼오오 모여 모기향 하나피워두고 물기 맺힌 캔 음료를 마시며 수다를 떨다 보면 어느새 해가 떠버리기도 한다. 여름의 밤은 짧으니까.

사람의 기억이란 고맙게도 간사해서, 여름 동안 더위를 왕창 집어먹고 헥헥대며 고생하던 기억은 금세 휘발되어버린다. 대신 뙤약볕밑에서 찍은 사진 속 맑은 하늘과 쏟아지는 햇살이 그림 같기에 사진 속의 여름을 그리워하게 된다. 올해의 여름은 이상기후로 폭우와폭염이 반복되어 이전의 여름들과는 다른 느낌이다. 여느 때보다 괴상한 날씨이지만 이런 여름마저 곧 끝나버릴 것을 알기에 벌써여름을 그리워하게 된다.

어느 계절이 다 그렇듯, 계절을 제대로 즐기기로 마음먹지 않으면 금세 시간이 흘러버려 다음 계절이 코앞에 다가와 있다. 여름도 그렇다. 왜인지 여름은 일 년의 절반에 가까운데도 아주 잠깐만 날씨에 관심이 없어도 달력을 보면 금세 입추가 지나고 겉옷을 챙겨 다녀야 할 날씨가 되곤 한다. 퍼붓는 해를 즐길 수 있는 시간은 바로 지금 밖에 없다. 다들 헬멧과 장갑을 챙겨 들고 안장 위에 오르자. 반소매와 장갑 사이의 팔이 새카맣게 탈 때까지, 그래서 바이크를 타지 않는 사람 눈에는 희한하게 손만 하얀 사람이 될 때까지 달려보자. 여름의 후덥지근한 바람을 뚫는 일은 생각보다 더 즐거우니까.
by.  채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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