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지만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 직역이 있다. 바로 프로 세계가 그곳인데, 실수하면 곧 패전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여류프로기사 루이나이웨이(芮乃偉)를 만난 것은 왕십리 한국기원 인근 s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였다. 뭐 내가 바둑계의 특별난 인물이어서가 아니라 우리는 아파트 25층에 살았고 그녀는 20층에 살았으므로 가끔 엘리베이터 안에서 만나게 된 것 뿐이다.
루이나이웨이(芮乃偉)는 별명이 ‘마녀’ 혹은 ‘철의 여인’이다. 절대 ‘실수를 하지 않는 여자 기사’라 해서 붙여진 별명인 듯싶다. 그녀는 2000년도에 조훈현, 이창호, 서봉수 등 한국의 내로라하는 남자 프로기사를 모두 물리치고 국수 타이틀을 거머쥐었던 여자다. 우리나라 여류 프로바둑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는 그런 대스타를 엘리베이터에서 만났으니, 걸음마 바둑애호가로서 실로 반갑고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어느 날인가 우연히 눈이 마주치게 되어 엉겁결에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루이나이 선생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라고 우리말로 인사를 했다. 그렇게 인사를 하고 나서 문뜩 아, 중국인이지! 별명처럼 도도하지 않을까? 우려를 했는데, 우려와는 달리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한국기사들과 대국을 많이 해서 그런지 우리나라 말을 잘 알아듣는 듯했다. 너무나 고마웠다. 그녀도 자기를 알아봐준다는 게 즐거웠던 모양이다. 그녀 옆에 늘 붙어 다니는 남편 장주주(江鑄久)도 빙긋이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 이후로는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면 스스럼없이 인사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한국기원 인근 청계천 산책로에서 만나는 날도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오랜만에 아내와 좀 멀리 외출하려고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는데 엘리베이터 안에서 또 그들 부부를 만났다. 오랜만이어서 그랬는지 그날은 그녀가 먼저 반가워하며 내게 인사를 건네 왔다. 그리고 “어느 프로기사를 좋아하세요?”라고 물어왔다. 나는 엉겁결에 당시 한창 승승장구하는 이영구 프로가 기억나서 그 기사를 좋아한다고 대답해주었다.(사실은 서봉수 프로를 좋아하지만) 그러자 그녀는 “이.영.구”라고 또박또박 복창까지 해가며 특유의 잇몸을 드러내고 환하게 웃었다. 나도 따라 웃었는데 웃다보니 어느새 엘리베이터가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다. 그 순간 그녀가 화들짝 놀라는 것이었다. 나하고 이야기 하느라 그만 1층 로비의 버튼을 누른다는 것을 깜빡했던 모양이다. 우주의 축소판이랄까, 바둑판 안에서는 바둑돌 한 수 한 수 정확하게 두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는 천하의 루이나이웨이가 그만 엘리베이터 층수 버튼 누르기를 깜빡하다니! 우리 부부가 지하 주차장에서 내리자 그녀는 뒤늦게 1층으로 다시 올라가는 버튼을 누르며 우리를 향해 멋쩍은 듯 빙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들 일류 프로 바둑기사 부부도 바둑판을 떠나면 어쩔 수 없는 그저 ‘다정하고 평범한 이웃 생활인’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s아파트에서 지금의 아파트로 이사한 지도 어느덧 1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무렵 그녀도 한국의 국수 타이틀을 반납하고 중국으로 돌아갔는데, 그날의 천진한 그녀의 웃음이 지금도 눈앞에 삼삼하다. 그리고 저녁노을이 붉게 물든 청계천 산책길을 어깨를 맞대고 걷던 그들 부부의 다정한 뒷모습도 그림처럼 선연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