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어머니교(敎)

M스토리 입력 2022.02.16 16:06 조회수 3,012 0 프린트
 
 
권혁수 시인
최근에도 중동에서는 여전히 종교적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 분쟁으로 난민이 우리나라에까지 흘러들어오고 있는 것을 보면 수만리 머나먼 중동의 전쟁이 남의 일이 아니지 싶다.

세계 인류사는 어쩌면 종교 전쟁의 기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만큼 하루도 종교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는데, 다행이 우리나라는 헌법으로 모든 종교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고 있고 다종교의 국민 끼리 비교적 큰 갈등 없이 지내는 것을 보면 세계에서 보기 드문 종교의 자유지대라 할 수 있다. 물론 가끔 일부 특정종교의 광신자들에 의해 다소의 갈등이 빚어지고 있긴 하지만 무리 없이 무마되거나 수습되어 어찌 보면 실로 지혜로운 국민의 모범적 국가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혹시 한국의 어머니들 때문은 아닐까?

가끔 가족 간에도 종교가 달라 갈등을 빚는 경우를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보고 듣게 된다.
우리 가족도 예외는 아니지 싶다. 아내는 어느 교단에도 소속되지 않은 무교(無敎)주의자이고 아들은 천주교계통의 고등학교 시절 영세를 받았고 딸은 기독교계통의 여자대학에서 채플 시간에 성경 공부를 하였다. 나 역시 기독교 신자였다가 최근 들어 친구의 권유로 불교 경전공부와 참선수행을 하고 있어 가족 간에 언쟁이 빚어질 때도 있다.

누나들도 천주교, 불교, 개신교로 나눠져 있어 마치 여러 개의 날개를 가진 팔랑개비 가족인 셈이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원만히 지내고 있는 편이다. 그것은 순전히 어머니의 가르침에 의해 조성된 분위기라 할 수 있다.

우리 가족은 매사에 다툼이 있을 경우 어머니가 한 말씀 하시면 그 말씀을 기점으로 하여 다툼을 중단하곤 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정갈하고 후덕한 위의가 그렇게 하게 하지 않았나 싶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는 생전에 우리 동네의 모범적 규범이셨다. 물론 집이 큰길가에 위치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동네 사람들은 늘 우리 집에 모여서 고사떡이나 별미음식을 나누어 먹었고 길을 가다가도 일부러 들러서 기쁜 소식과 아픈 마음을 함께 나누고 위로하며 지냈다.

어머니는 달력 없이도 집안은 물론 동네 사람들의 대소사를 모두 기억하셨고 선친의 기제사 때도 어머니 주재 하에 각 종교의 제례방식을 감안하여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반드시 축문에다가는 각 가정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하고 나서 조상께서 소찬을 흠향하고 후손들을 잘 보살펴 주실 것을 적도록 하여 축원하는 한편, 아멘, 상향(尙饗),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을 축문 말미에 두루 거명함으로써 제사를 원만히 마무리 지었다.

누가 들으면 웃을지 몰라도 이는 어머니의 확고한 신념에 의한 것이었다.
“형제간에 다투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게 어머니의 뜻이었다. 물론 어느 가정의 어머니가 형제들 끼리 다투라고 말을 할까마는 우리 어머니는 특히 형제간의 우의를 강조하셨다.

어머니는 조선말 여성 불평등 시대에 태어나 대가족 살림을 건사하느라 공부할 틈이 없어 한글조차 읽을 줄 몰랐다. 하여 부처님, 예수님, 천지신명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단 한 줄도 몰랐지만, 한 지역의 어머니교(敎)의 원만하고 충실한 교주(敎主)였다. 하여 우리 가족들 모두는 각자가 갖는 다른 종교의 가르침대로 살다가 고향집으로 돌아와서는 어머니께 그동안의 삶의 행적을 아뢰고 평가를 받고 칭찬을 듣거나 충고를 듣거나 하였다.

이제는 돌아가셔서 직접 가르침을 전수받을 수 없게 되었고, 자주 모이지 못해 다툴 일도 없지만, 그래도 기일에는 한 번 씩 모여 어머니가 남겨주신 유지를 기리고 마음을 나누며 살아가고 있다.

어쩌면 어머니교는 우리 가족만의 종교지만 세계인의 모든 가정에서 모시는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종교가 아닐까 싶다.

우리 모두의 공동의 종교. 매일 매일 그리운 교주, 어머니에 의한 어머니의…
M스토리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