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호대기 중인 수많은 배달바이크들 중 작고 빨간 바이크 하나가 튀어나온다. 위에 앉아있는 사람은 마른 체형이지만 성별을 추측하기 어렵다. 신호가 풀리고 각각의 배달 바이크들은 저마다 튀어 나간다. 빨간 바이크는 작은 몸집을 이용해서 수많은 차들 사이를 비집고 지나간다. 그렇게 빨간 바이크가 도착한 곳은 목욕탕이다. 자연스럽게 여탕 문을 열고 들어가서 “짜장면 배달이요!” 라고 외친다. 여탕에 있던 사람들은 경악한다. 은찬은 헬멧을 벗어 던지며 “여자거든요!!“라고 외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비명을 지르며 은찬이를 내쫓는다.
2007년에 나왔던 드라마인 <커피프린스 1호점>의 첫 장면이다. 당시 드라마를 방영하던 2007년에는 별 감흥 없었지만, 현재 은찬이와 똑같은 기종의 이륜차를 타고 있는 2020년의 내가 보기엔 너무나 재밌는 장면이 되어버렸다. 멋있는 바이크를 타는 여자 캐릭터는 은근 찾아보면 많지만 생계형으로 배달 노동을 하는 여자 캐릭터는 정말 희귀하다. 수많은 남자들의 배달이륜차들 사이에서 빨간 이륜차 위에 앉아 운동화를 아스팔트 바닥에 끌고 있는 모습은 한국에서 이륜차를 타고 있는 내 모습과 너무 똑같아서 정이 간다.
여탕을 나와 다음으로 간 배달지는 한결이네 집이다. 한결이는 당연히 배달원은 남자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샤워하고 바로 나온 차림이지만 은찬이를 집안에 들인다. 은찬이는 당황해하면서 짜장면을 식탁에 올려두고 나온다. 나도 배달을 했을 당시 내가 여자인 것을 알고 당황하는 고객들이 있었다. 그중에는 정말로 팬티만 입고 나오는 인간들도 있었다. 배달라이더들 사이에서는 이런 남자들을 진상이라고 여기고 ‘팬티충’이라고 부른다. 한결이는 드라마 속 무척 로맨틱하게 표현됐지만 사실은 ‘팬티충’인 것이다. (사실 드라마 속에서는 팬티도 입지 않고 팬티 대신 수건만 걸쳤다라는 설정으로 나온다.)
은찬이는 배달을 하다가 날치기를 만난다. 이륜차로 따라잡아 핸드백도 되찾아줬지만, 그 누구도 고맙다고 하는 이는 없다. 오히려 짜고 치는 거 아니냐면서 오해만 받게 된다. 엎친 데 덮친 격 배달 일을 하던 곳에서 이륜차를 망가트렸다는 이유로 잘리게 된다. 그렇게 이륜차는 은찬이 것이 되어버린다. (사실 이륜차 멀쩡해 보이는데 주다니 나름 나쁘지 않은 데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살기 팍팍한 현실에서 은찬이에게는 고물 시티백 한 대만 남았다.
이 뒤로 이러쿵저러쿵 한결과 우연치않게 만나게 되고 그 우연을 빌미로 어쩌고 저쩌고 로맨틱한 사이로 발전을 하다가 한결에게 상처를 받아 은찬이가 이륜차를 타고 우는 모습이 나온다. 사실상 가지고 있는 게 낡은 고물 이륜차밖에 없는 은찬이는 이륜차를 타고 다니면서 엉엉 우는데 어찌나 서럽게 울던지 마음이 아프다. 맘껏 울 곳도 없어서 이륜차를 타고 다니면서 우는 것 또한 너무 안쓰럽게 느껴진다.
사실 이 커피프린스 1호점이라는 드라마에서 이륜차는 그렇게 중요한 매개체는 아니다. 이건 그냥 이륜차 과몰입녀인 나의 주접들을 늘어놓은 글이다. 사실 은찬이가 이륜차를 갖게 됐을 때 “에라 모르겠다”하고 전국 일주라도 떠나버리는 이야기가 전개됐다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 사실 이륜차가 여성 캐릭터에게 너무 중요한 매개체로 여겨지지 않아서 좋은 지점도 있는 것 같다. 가끔 여성 캐릭터에게 이륜차란 반전의 의미를 가질 때가 종종 있다. 마치 “충격 반전! 조신한 줄만 알았던 ㅇㅇ이가 이런 털털한 모습도!?”라는 느낌으로 말이다. 물론 이 척박한 이륜차 타는 여성 캐릭터의 시장에서는 그렇게라도 표현되는 게 감사한 게 사실이지만 2020년에 그걸 보기엔 너무 뒤처진 연출 아닌가 싶다. 은찬이는 그냥 처음부터 이륜차를 탄다. 생계를 유지하려고 배달 일을 한다. 남자라고 오해해서 여탕에서 내쫓는 사람들은 있어도 어떻게 남자한테도 어려운 일을 여자가! 라는 유난스러운 연출은 없다.
커피프린스를 마지막 화까지 다 보고 나면 꼭 어디선가 은찬이가 잘살아가고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은찬이가 현재도 낡은 시티백을 타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CG125 같은 바이크를 클래식한 느낌으로 커스텀 해서 타고 다니지 않을까? 라는 상상을 해본다.
치맛바람라이더스 by 윤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