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 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의 크리스티나 양과 경찰서 시트콤 <브루클린 나인나인>의 로사는 비슷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직업에 프라이드를 가지고 있고, 지고는 못사는 성격에 사적으로도 공적으로도 엄청난 승부욕을 가지고 있으며, 무서워보이기까지 하는 그들은 모두 오토바이를 탄다. 크리스티나 양은 클래식 바이크를 타고 출근하는 모습을 보이고, 로사는 야마하의 대표 시리즈격인 R시리즈의 R1을 탄다. 현실에서는 가격과 취향에 지나지 않지만 미디어에서 바이크의 디자인은 매우 중요하다. ‘멋진 캐릭터’를 보여주고 싶을때는 그를 절대 스쿠터에 태우지 않는다. 마치 자동이 아닌 수동 기어변속 바이크가 얼마나 멋지고, 프로페셔널하고, 매력적인 캐릭터인지 결정하는 것 마냥 말이다. 1984년작 <터미네이터 1>에서 사라 존 코너가 탔던 바이크는 혼다의 스테디셀러 스쿠터인 엘리트이지만 <터미네이터 2>에서 존 코너가 타는 바이크는 청소년에게 어울리면서도 스포티함이 드러나는 듀얼바이크 혼다 XR80, 터미네이터가 타는 바이크는 묵직한 덩치를 자랑하는 할리데이비슨의 팻보이인것처럼 말이다. 미디어에서 모터사이클은 캐릭터의 비주얼적인 완성을 도와주는데 사용되기도 한다. 바이크가 내용상 꼭 필요한 존재가 아닌 비록 악세사리로 사용될지라도 캐릭터와 바이크를 섬세하게 짝지을수록 캐릭터를 돋보이는데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미국의 메디컬 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에는 다양한 모습의 관계와 여성 캐릭터들이 등장하는데, 그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는 산드라 오가 연기한 크리스티나 양(Cristina Yang)이다. 크리스티나 양은 어렸을 때부터 천재 중 천재였고, 항상 최고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1등을 놓치지 않는다. 여기까지만 읽으면 크리스티나는 재미 같은 건 모르는 진부한 모범생이다.
그러나 크리스티나가 오토바이를 타고 출근하는 모습이 스쳐 지나가자마자 갑자기 크리스티나가 입체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크리스티나는 어떤 면에선 클리셰를 퍼부은 듯한 아시안 스테레오 타입의 모습을 하고 있다. 과하게 간섭하는 부모, 1등을 놓치면 죽을 만큼 괴로워하는 모습 등. 그러나 오토바이를 타고, 맥주가 아닌 데킬라를 마시며, 수술실에서 마돈나의 ‘Like a virgin’을 부르며 춤을 추는 등 스테레오 타입에서 벗어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크리스티나라는 캐릭터가 단순히 천재 아시안 스테레오 타입이 아닌 하나의 입체적인 인물임이 느껴져 짜릿하다.
오토바이를 타는 크리스티나의 모습은 정말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는데, 그 순간이 너무 좋아서 다섯 번은 돌려봤다. 가죽 자켓을 입고 차들 사이에서 주차를 하고, 헬멧을 벗어 머리를 휘날리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심지어 그게 산드라 오라니!
그를 좋아하는 나에게 그 장면은 자극으로 다가왔다. 오토바이 타는 산드라 오를 볼 수 있다는것 만으로 그레이 아나토미의 모든 화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되었다. 그 뒤부터 크리스티나가 뭘 하든 자꾸 응원하게 됐다. 다른 취미나 생활 방식이 비슷하다는 이유로는 이렇게까지 반갑거나 좋아하게 되기 쉽지 않은데, 오토바이가 뭐길래!
오토바이를 탄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렇게까지 친밀감을 느끼게 되다니 참 웃기다. 아쉽게도 크리스티나가 오토바이를 타는 모습은 단 한 번 나오고, 그 뒤로도 스쳐 지나가듯 언급되고 끝난다. 그렇지만 그 짧은 장면 하나로 크리스티나가 최애 캐릭터가 되어버렸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더 많은 여자들이 오토바이를 타서 더 이상 오토바이 타는 여자들을 발견할 때마다 금광을 발견한 기분을 느끼기보다는 더 침착하게 그들을 대할 수 있기를 바란다.

<브루클린 나인나인>은 브루클린의 99관할서를 배경으로 한 시트콤이다. 로사는 주 등장인물중 가장 무서운 인물로 그려진다. 사생활을 철저하게 감추고, 감정을 드러내는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강단있고, 정의롭다. 단순히 위협을 잘 하고, 무기를 잘 다루고, 싸움에 능한것보다 모두가 귀기울여 듣게 하는 카리스마를 가졌다는 점이 가장 멋지다. 사계절 내내 검정색 가죽자켓을 입고 다니는 로사가 바이크를 타는 모습은 그보다 자연스러울 수 없다.
어느날 직장동료가 바이크를 타는 타투이스트를 소개시켜주려고 하자 ‘그 남자 야마하 타지 않아? 야마하 바이크를 타는 남자랑 만날바에야 스테이션웨건으로 태우러 오는 남자가 낫다’며 단칼에 거절한다. 골수팬들은 본인도 야마하 바이크를 타면서 야마하를 깎아내리는 본 장면이 설정상의 오류라고 말한다. 하지만 다른 관점으로 살펴보자. 어차피 바이크를 안타는 직장동료는 로사의 바이크가 야마하인지 스즈키인지 KTM인지 관심이 없을 것이다. 같은 색이기만 하면 아마 로사가 바이크를 기변해도 전혀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로사는 바이크에 관하여 아무렇게나 말해도 동료는 이상함을 알아채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이용한게 아닐까? 남자를 소개받고 싶지 않은 로사가 아무렇게나 핑계를 댄 것이라고 말이다. 뻔뻔하게 거짓말하는 모습은 로사라면 충분히 할법한 행동이다. 로사가 특별한 이유는 바이크 타는 여성의 클리셰뿐만 아니라 현실성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바이크로 출근하고, 남자친구와 헤어질 결심을 하기 위해서 밤바리를 하며 생각을 정리하는 장면등으로 봤을때 로사에게 바이크는 이동수단일뿐만 아니라 취미이기도 하다. 또, 로사에게 바이크가 하는 중요한 역할이 하나 더 있었으니.. 그건 바로 핑곗거리이다. 미국의 큰 명절인 땡스기빙데이에 뭘 하냐는 질문에 로사는 ‘바이크를 타고 혼자 여행을 간다’고 대답한다. 혼자만의 시간을 좋아하는 로사이기에 다들 납득하지만 사실 로사는 부모님과 함께 시간을 보낼 예정을 가지고 있었다. 본인의 보여지는 성격과 바이크를 이용하여 알리고 싶지 않은 사실을 감추는데 사용한 것이다.
본 드라마의 주 등장인물 중에서는 로사가 유일하게 바이크를 탈 수 있는 사람이다. 바이크를 타야만 하는 장면에서 그 사실은 명확해진다. 막히는 도로에서 빠르게 이동해야 할 때 바이크를 발견하고, 로사와 99관할서의 반장인 테리가 바이크를 타는데, 당연히 로사가 핸들을 잡고 제퍼즈는 로사 뒤에 텐덤하며 주행 내내 무섭다며 소리를 지른다. 또, 다른 에피소드에서 드라마의 주인공격인 제이크가 바이크를 탈 줄 아는척 잘난체를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제이크는 롤모델인 형사 호킨스에게 잘보이기 위해서 본인이 바이크를 가지고 있지만 아쉽게도 정비를 맡겼다며 상황을 회피하려 하지만 누군가가 바이크를 빌려주겠다고 한다. 제이크는 솔직하게 바이크를 탈 줄 모른다고 얘기하지 않고 무작정 바이크 위에 올라타지만 정작 출발도 하지 못한다.
미디어에서 남성이 바이크를 발견하고 아무렇지 않게 바로 올라타서 주행하는 모습은 비현실적이다. 스쿠터라면 몰라도 매뉴얼 바이크는 초보의 경우 연속해서 시동을 꺼트리는 것은 당연하고, 기어변속 타이밍이 익숙하지 않아 버벅대기도 일쑤다. 여성의 뒤에 매달려 무섭다며 소리를 지르는 모습이나, 바이크를 탈 줄 모르는 사람이 바이크에 탔다가 아예 바이크를 놓쳐서 출발도 하지 못하는 등의 미숙한 모습등을 가감없이 보여주는 것이 좋았다. 바이크를 더 잘 타는 기준은 젠더가 아니고, 경험이 있는 사람이 잘 탄다는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