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향 방문을 흔히들 ‘내려간다’고 표현하지만, 순천에 살고 서울이 고향인 나로서는 고향에 ‘올라가는’ 입장이다. 코로나 거리 두기가 완전히 해제되고 나서 명절은 다시 내려가고 올라오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시기가 되었다. 그래서 이번 추석은 조용히 순천에서 보내고, 추석 2주 뒤인 10월 중순에 바이크를 타고 귀향하기로 결심했다. 9월이면 몰라도 10월이면 장거리를 떠나기엔 꽤 추운 날씨. 평소라면 도전하지 않았겠지만, 이상하게 따뜻한 올가을 날씨 덕분에 올해 마지막 장거리 로드트립을 떠날 수 있었다. 이런 적당히 선선한 날씨의 장거리를 준비할 때는 복장에 신경을 써야 한다. 낮에는 덥다고 느껴서 가볍게 입고 출발했다간 해가 지고 덜덜 떨며 후회하기 때문이다. 서울행을 결심하고 가장 먼저 한 것은 겨울용품을 넣어둔 박스에서 방한 토시를 꺼내 바이크에 단 것이다. 청바지 안에 얇은 내복을 하나 입고, 위에는 혼다 레이싱이 프린트된 퀼팅 봄버자켓을 입고, 방풍이 되는 긴 돕바를 탑 박스에 챙겨 출근했다. 야근까지 마치고 퇴근하니 밤 9시. 카페에서 따뜻한 자몽차를 텀블러에 포장하고, 돕바를 꺼내입고, 프로텍터를 착용한 뒤 안장에 올랐다.
순천에서 서울까지의 직선거리는 약 300km. 90~300km/h로 달리는 KTX로는 2시간 40분, 고속버스로는 3시간 40분-연착되는 일이 잦다-, 자가용으로는 4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하지만 바이크를 운전한다면 고속도로와 자동차 전용도로를 피해서 운행해야 하는 거리가 350km가 되고, 소요 예정 시간은 자가용에 비해 2시간이 늘어난다. 긴 근무 시간에 피로해진 몸으로 서울까지 한 번에 올라갈 순 없기 때문에 작전이 필요했다. 순천에서 서울까지 가는 길에 거치는 도시들은 순서대로 남원 > 전주 > 논산 > 공주 > 천안 > 오산 > 성남. 첫날 도착지의 최소 목표는 전주, 최대 목표는 천안으로 잡았다. 사실 해가 떠 있는 시간대엔 천안까지 진입하는 길이 늘 막히기 때문에 피곤해서 쓰러질 것 같지만 않으면 최대한 위로 올라가서 하룻밤 묵는 것이 좋았다. 전주도 천안도 숙소가 많은 큰 도시이고 예약이 어려운 성수기도 아니기 때문에 숙소 예약은 일절 하지 않았다.
그런데 출발한 지 10분쯤 되었을까? 갑자기 핸들 바에 고정된 핸드폰 거치 가방이 툭 떨어졌다. 아직 순천도 벗어나지 않았는데 불안했다. 고정하기 위해서 양 고리에 묶어둔 케이블 타이의 한쪽만 끊어진 거라 떨어트리지는 않았지만 바람이 부는 대로 달랑거리면서 금방이라도 핸드폰이 떨어질것 같아 수습을 하기 위해 눈앞에 보이는 주유소에 멈췄다. 일단 주유소에 내렸으니 겸사겸사 기름을 가득 채웠는데 2리터도 채 들어가지 않아서 민망했다. 핸드폰 거치 가방에 있는 고정용 찍찍이로 다시 핸들 바에 고정하고, 이제는 순조롭게 달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고정이 잘 안되어서 핸드폰 거치 가방이 계속 뒤집히고, 찍찍이가 풀어지는 등 말썽이었다. 핸드폰을 탑 박스에 넣어둘지 잠시 생각했지만 일단 외투 주머니에 핸드폰을 넣고 계속 갈 길을 가며 중간중간 신호가 멈추는 곳에서 핸드폰을 꺼내 방향을 확인했다.
남원을 지나 ‘안녕히 가십시오’ 하는 표지판을 보고 혼잣말로 ‘또 올게요~’ 인사를 한 지 얼마 안되었던 때였다. 잘 듣고 있던 팟캐스트 방송이 갑자기 끊겼다. 전화가 오거나 핸드폰이 꺼졌나? 아니면 설마…. 하면서 핸드폰을 넣어둔 주머니에 살짝 손을 넣었는데 핸드폰이 없었다.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이 날아간 것이다. 깊이가 적당히 있는 주머니라 한 번도 핸드폰이 떨어진 적이 없었는데 바람이 많이 부는 날씨 때문이었던 건지, 운전 시간이 길어져서 핸드폰이 천천히 빠져나오고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다. 자책하거나 깊이 생각할 시간은 없다. 침착해야 한다. 최대한 빠르게, 그러나 뒤차와 안전거리를 유지하면서 끝 차선으로 서서히 이동하고 갓길에 바이크를 세웠다. 소리가 끊긴 지점으로부터 적어도 500m는 이동한 것 같았다. 핸드폰이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작동한다면 연동된 블루투스 이어폰과 애플워치를 이용해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 헬멧도 벗지 못한 채 전력 질주해서 예상 지점 근처로 이동했다. 도로와 그 주변 길가에 떨어진 물건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가로등 하나 없는 곳이라 어두운데 핸드폰이 없으니, 불빛을 비출 것도 없었다. 예상지점을 천천히 걸으며 바닥을 보았는데도 도저히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갑자기 블루투스 이어폰에 이전에 재생시켜 둔 ‘2009년대 K팝 인기곡’ 플레이 리스트가 흘러나왔다. 구슬픈 발라드가 내 마음을 대변하는 듯했다. 분명히 여기 근처인데 보이지 않는다는 건 수색하지 않은 방향을 확인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내가 달리던 도로의 반대 차선을 막아둔 바리게이트 가까이 가보니 바리게이트 바로 아래에 떨어져 있는 신용카드를 찾았다. 핸드폰 케이스 안쪽에 끼워둔 내 신용카드였다. 카드가 여기 있다는 건 근처에 핸드폰이 있다는 신호. 반대쪽 1차선에 핸드폰이 보였다. 애플워치로 핸드폰 찾기 버튼을 누르니 띠링띠링 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핸드폰이 엎어져 있어서 액정 상태가 확인되지는 않는다. 일단 연동이 된다는 건 작동이 된다는 뜻이니 핸드폰을 줍기 위해 빙 돌아 반대 차선으로 갔다. 어둡고 횡단보도가 없어서 주워 오는 것도 위험천만하고 어려운 일이었다. 어떻게든 핸드폰을 구조했을 때 핸드폰은 1차선이 아닌 2차선으로 이동해 있었다. 그새 다른 차에 밟힌 것이다. 핸드폰 위로 지나간 차가 한두 대는 아니었던 것 같다. ‘어떻게 아직도 작동되지?’ 싶을 정도로 바스러진 액정에는 너머로는 흰색 불빛만 드문드문 보일 뿐이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헤치고 정보를 정리해 본다. 일단 남원을 지났으니, 전주가 나올 것이고, 출발할 때 확인했던 내비게이션 경로에 따르면 전주에서 그다음 국도로 갈아탈 수 있었다. 일단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으며 직진했다. 20분쯤 달렸을까? 갑자기 마주친 도로 통제 안내를 따라 국도에서 빠져 좁은 길로 들어왔다. 나는 누구이고 여기는 어디인가? 어느 조용한 마을 입구에 주차하고 도로를 통제하는 직원에게 국도로는 못 가냐고 물었다. 통제 중인 직원에게 국도로 갈 수 없냐고 묻다니 어지간히 정신이 없던 게 분명하다. 이 길을 따라 쭉 가서 우회전하면 한옥마을이 나온다고 한다. 한옥마을에 간들 그다음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막막함이 다시 밀려왔다.
▶ 다음호(179호)에 '우당탕 로드트립 -2-'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