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수 시인의 문화 산책] 보이는 집·보이지 않는 집

입력 2022.05.15 22:06 조회수 2,827 0 프린트
 

권혁수 시인
몇 년 새 아파트 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랐다. 뉴스를 보며 마치 내가 가족을 위해 무슨 큰일이나 한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과연 나와 가족의 삶의 질과 품격도 아파트 가격만큼 올랐을까?
주변 사람 가운데 간혹 나에게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다.

“건축 전공자가 어찌 아파트 같은 필요한 집은 안 짓고 엉뚱한 일을 하시나?”

그럴 때마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답해준다.

“허허. 무슨 말씀을. 건축가들이야 아파트 같은 눈에 보이는 집을 짓지만 나는 작가라 보이지 않는 집을 짓는다네. 건축과 출신 시인 겸 소설가 이상(李箱)도 있잖은가.”

작가(作家)는 일반적으로 시나 소설 또는 회화, 조각 등 예술작업을 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다. 말 그대로 지을 작(作) 집 가(家), 곧 정신이 쉴 수 있는 영혼의 집을 짓는 사람을 의미한다.
보이는 집 가운데 가장 큰 집은 피라미드 같은 신(神)을 위한 신전(神殿)이다. 그렇게 거대하지는 않더라도 일반인들도 크고 넓은 집을 짓고 행복하게 살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세계적인 건축가 르꼬르뷔지에는 일생 대성당과 각종 정부 청사와 미술관 등등 공공의 건축물을 무수히 설계하였지만 자신은 지중해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4평짜리 오두막을 짓고 아내와 함께 명상하며 말년을 보냈다. 혼자만의 마음의 공간 곧 휴식과 명상을 하기에는 4평이면 족했던 것이다.
그런가하면 나의 절친인 조각가 양재건교수는 최근 정년에 즈음하여 30평대의 작업실을 C시의 한적한 호숫가에 짓고 있다. 그는 조각을 하는 관계로 그 정도의 작업 공간이 필요하였겠지만, 나 같은 글쟁이는 르꼬르뷔지에처럼 4평이면 족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 작업실의 위치가 어디냐가 문제인데, 양교수나 르꼬르뷔지처럼 호숫가나 바닷가가 딱 좋아 보인다. 그런 곳에 오두막을 짓고 호수나 바다를 바라보며 유유자적 하루를 지내다 누구나 공감하며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글 한 편 쓰고 싶다.
하지만 양교수나 르꼬르뷔지에의 부인처럼 나의 아내가 그런 내 순수한 계획을 허용할 지는 미지수다. 아내는 현재 거주하고 있는 S시의 고층아파트를 선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백화점과 시장, 병원이나 아트센터, 동창들이 가깝게 산다는 이유 때문에 그렇다.
게다가 어느 날은 몽상을 하고 있는 나를 향해 직격탄을 한 방 날린다.

“공부방이 있다고 공부 잘 했나요? 다 핑계에요.”

그리고 볼펜 한 자루면 전국 어디서나 쓸 수 있는 게 글이라고 강조한다. 하긴 경치 좋고 물 좋은 호숫가나 바닷가라고 명작이 쉽게 나올까만 그래도 나는 요즘 매일 눈에 삼삼한 나만의 오두막을 설계 해보는 한편 보이지 않는 내 마음의 집도 볼펜으로 무수히 적어보며 하루를 지내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무심히 무슨 글을 쓸까 고민하며 산책을 해보는데, 아파트 인근 공원 숲속에서 까치소리가 요란했다. 어떤 사태가 숲속에서 일어났다고 공원 관리원에게 알려주는 소리다. 그 소리는 멀리서 들어도 맑고 청아한데 그 소리의 소유자인 까치는 지붕도 없고 에어컨이나 온돌도 없는 둥지에서 무난히 새끼를 기르며 살아간다! 관청에 집세도 내지 않고 골머릴 앓으며 애써 글 한 줄 쓰려고 고생하지도 않고…… 아하 그래 바로 저런 집 저 소리야!
문뜩 까치소리를 들으니 조화식(鳥和息)이란 명상법이 생각났다. 대부분의 조류는 특유의 호흡법으로 하여 목청이 청아하다는 것이다. 어린아이와 같은 복식호흡이라 할 수 있는 호흡법인데, 바로 석가모니를 깨달음에 이르게 한 명상을 위한 호흡법이기도 하다.
오늘도 공원에 나가 까치와 함께 조화식 심호흡을 해보며 나만의 보이는 집과 보이지 않는 집을 은근히 마음에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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