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선 여행기] 스펙타클한 부여 - 군산 여행

입력 2022.03.02 16:32 조회수 2,906 0 프린트
 
서울에서 순천으로 이사를 온 지는 1년이 되었지만, 에이프는 아직 서울에 남겨진 상태로 어느새 에이프는 종종 서울에 올라갔을 때만 타는 ‘서울 전용 바이크’가 되어버렸다. 그런 에이프를 새로운 집인 순천으로 데려오는 동안은 총 5박 6일이 걸렸다. 하지만 이 여행기에서는 홍성에서 군산까지의 여정만을 다룰 예정이다. 서울에서 홍성까지는 친구들을 만나는 것이 목적이었고, 군산 이후에는 피곤에 절어 숙소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딱히 여행기라 서술할 만한 것이 없다. 그래서 오늘의 출발지는 홍성, 도착지 군산이다. 

떠나기 전날 밤, 전국적으로 비가 내렸다. 잠들기 전까지 기상예보를 계속 확인하며 초조하게 비가 올 경우의 계획까지 생각했지만 다행히도 아침에는 그쳐있었다. 비구름이 남쪽으로 내려갔는지, 아래로 내려갈수록 아직 비가 오고 있었지만 조만간 그칠듯해서 과감하게 당장 출발하기로 했다. 언제 또 비가 올지 몰라서 급하게 씻고 짐을 싸고 친구들과 작별 인사를 했다. 시동을 걸었을 때 시간을 확인하니 오전 9시 30분. 오늘의 이동거리는 약 100km로 쿼터급만 되어도 한 번에 돌파하기에 무리가 없는 거리이다. 하지만 이번에 함께한 바이크는 혼다의 에이프로 포지션도 불편하고 배기량도 작아서 천천히 움직이기로 했다. 엊그제 홍성에 들어올 때는 한밤중이라 가로등도 없어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벽에 바이크를 박을뻔하는 아찔한 상황도 있었는데, 해가 난 시골길은 평화롭기만 하다. 
에이프에 짐대가 없어서 짐은 모두 배낭에 쑤셔 넣었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이륜차를 타면 어깨가 아파지는데, 그럴 때면 배낭을 시트에 살짝 걸쳤다. 그렇게 하면 배낭 무게의 80% 정도는 시트가 지탱해 주어 달릴만했다. 시골길을 빠져나와 국도 29번에 진입하자 탄성이 절로 나왔다. 아주 깨끗하고 쾌적한 왕복 4차선 도로였다. 공사를 마친지 얼마 안 된 것처럼 하자가 없는 도로에 감탄하며 신나게 스로틀을 당겼다. 하지만 부여까지 1/3 정도 남은 지점부터 좁은 왕복 2차선 도로로 빠지게 됐는데, 공사를 줄줄이 하느라 한쪽 도로를 막아둔 부분들이 많았다. 

부여에 진입하니 포도 직매장들이 곳곳에 보였다. 멈춰 서서 택배로 포도를 한 상자 구입하려고 했는데, ‘저희는 택배를 안 해요. 저 옆에 가게는 택배를 할 테니까 거기로 가보세요.’라고 하셔서 ‘아 제가 가지고 갈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들고 갈 수가 없어서 옆 가게에 가야겠네요.’라며 아쉬움을 표하고 옆 가게로 방향을 틀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러면 포도 한 송이 드릴까요?’라며 까만 비닐봉지에 실한 포도를 한 송이 담아서 가면서 먹으라며 건네주셨다. 나는 여기서 포도를 사지도 않았는데 받아도 되는 건가, 싶었지만 너무 밝은 표정으로 포도를 건네주셔서 감사하다며 연신 인사를 하고 추천해 주신 가게에 가서 포도 한 박스를 택배로 주문했다. 그런데 그 가게에서도 가면서 먹으라며 까만 비닐봉지에 포도를 한 송이 담아주셨다. 심지어 이번에는 샤인 머스캣으로! 순식간에 포도가 종류별로 두 송이나 생겼다. 배낭은 노트북과 옷으로 꽉꽉 차서 가방 버클을 겨우 닫은 상태라 까만 봉다리 두 개를 핸들에 걸고 첫 번째 목적지인 수북로 1945에 도착했다.
 
 
 
수북로 1945는 피크닉 카페를 표방하는 곳으로, 정말 피크닉에 온 것처럼 마당에서 차를 마실 수도 있고, 여러 별채 중에 원하는 자리에 앉을 수도 있다. 아침을 챙겨 먹지 못해서 브런치 메뉴인 샐러드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샐러드와 커피가 든 피크닉 가방을 받아들고 정원이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카페 사장님이 주차를 안내해 주시면서 바이크를 유심히 살펴보신다는 걸 자각하고는 있었는데 편하게 보시라고 슬쩍 모른척하고 있었다. 속으로만 바이크에 관심이 많으신가 보다 하며 지나쳤는데, 사장님이 공구를 들고 바이크 옆에 오신 것을 보고 나가보니, 후미등을 고정하는 프레임의 볼트 하나가 빠져있는 걸 보시고 볼트를 달아주시려고 사이즈를 가늠하고 계신 거였다. 나도 같이 바이크 옆에 서서 사장님이 작업하시는 걸 바라보다가 뒤쪽의 오른쪽 윙커가 떨어져 달랑달랑하게 전선에 매달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사태를 알아채신 사장님은 근처에 센터가 있는데 가볼 거냐고 물으시곤 센터까지 가는 동안 윙커가 떨어지지 않도록 케이블 타이로 고정을 해주셨다. 부여에 오자마자 작은 친절들을 받고는 부여에 더 머물고 싶어졌다. 하지만 당장은 바이크를 고치러 가야 했다. 아직 한낮이지만 한국의 가을은 순식간에 해가 떨어진다. 어둡고 추운 야간 주행은 하고 싶지 않다. 
 
 

수북로 1945 사장님은 도착했을 때부터 어디서부터 바이크를 타고 왔냐며 관심을 많이 보이셨는데 떠날 채비를 하니 나오셔서 연신 바이크로 여행하는 게 너무 멋있다고 얘기하다 남긴 한마디가 인상적이었다. “누구든지 꿈꾸는 건데, 실제로 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즉흥적인 여행과 오랫동안 꿈꿔온 여행 그 사이에 존재했던 이번 여행은 그 한마디로 완성된 것만 같았다. 누구나 언제든 떠나고 싶어 하고, 당장이라도 떠날 수 있을 것 같지만 떠난 사람만아 가질 수 있는 풍경이 있다.

수북로 1945에서 약 500미터 떨어진 아주 가까운 곳에 바이크 센터가 하나 있는데, 대체 공휴일이어서 그런지 오늘은 휴무라고 해서 부여읍에 있는 <화신 이륜차>로 향했다. 센터에서 살펴보니, 어제 비바람에 바이크가 바람에 쓰러질 때 후미등의 우측 깜빡이를 고정하는 바가 부서진 것이었다. 용접을 하고 깜빡이를 달면 용접 부위가 약해질 것 같다는 말에 사장님은 기지를 발휘하여 좌측과 약간 다르지만 깜빡이가 잘 보일만한 위치에 새로 달아주기로 하셨다. 이륜차와 짐을 잠깐 센터에 맡기고 잠시 산책을 나섰다. 센터에서 걸어서 오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정림사지가 있었다.

오래된 석탑과 불상을 보고 천천히 센터로 돌아오니 작업이 끝나있었다. 곧바로 라이딩 기어를 챙겨 입고 스로틀을 당겼다. 경치가 좋다며 추천받은 성흥 산성을 경유하는 경로로 내비게이션을 찍었지만, 출발한 지 5분이 안되어 비가 한두 방울씩 떨어지고 있었다. 비가 얼마나 올지, 언제 그칠지 알 수 없으니 경유지를 취소하고 곧장 최종 목적지인 군산으로 경로를 변경 했다.

천천히 떨어지는 가랑비도 바이크에 타고 있으면 몇 배나 빠르게 느껴진다. 서천의 한 시골길에 잠시 바이크를 세우고 비를 피하며 쉬기로 했다. 아무도 없는 버스정류장에 앉아 부여에서 받아온 포도를 먹었다. 20분이 지났을까, 비는 멈췄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오늘의 숙소는 군산의 서쪽 끝, 비응도에 있는 ‘라온하제 호텔’이다. 군산 시내에서 비응도까지는 바다를 끼고 달리는 길이라 해안 도로를 기대하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바다는 전혀 보이지 않고 공업단지 뷰에 각종 커다란 공업용 차량 등을 조심해야 한다. 군산은 바다를 끼고 있긴 하지만 공업지대가 많아 여유로운 바다를 즐기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라온하제 호텔 객실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평화로웠다. 도착한 날에는 비가 와서 날이 흐렸지만 다음날 아침, 활짝 갠 하늘보다 바다는 더 파란색으로 반짝였다. 호텔에서 제공하는 조식은 평범했지만 멋진 뷰와 함께하니 두 배는 더 맛있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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