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맛바람라이더스의 치맛바람 휘날리며] 어떤 라이더의 겨울

M스토리 입력 2022.03.02 16:22 조회수 3,081 0 프린트
 
사람마다 진정한 겨울의 시작일이 다르겠지만, 나의 겨울은 편의점 가판대에 빼빼로가 많이 보일 때쯤, 혹은 SNS에 수능에 대해서 한마디씩 얹는 사람들이 보일 때쯤에 시작된다. 겨울이 시작되면 에이프(혼다 XZ100)는 시동이 잘 걸리지 않는다. 에이프 옆에 덤덤한 듯 서있는 1992년식 자이로(혼다 자이로 X)는 멀쩡한데, 심지어 셀 버튼으로 일발 시동이 걸리는데 말이다. 비록 주행 중 엔진의 부조 현상으로 스로틀을 아무리 당겨도 속도가 나지 않는 경우가 이틀에 한 번씩 생기지만 그건 30년 된 오토바이를 매일매일 주행시키는 나의 숙명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주행 중 스로틀을 당길 때 ‘오늘은 출근 안 합니다.’라고 말하듯  에이프는 이렇게 추운 날마다 한 번씩 시동을 거부했다. 그런 에이프를 붙잡고 몇 십 번이나 킥을 자고 있노라면 몇 겹이나 껴입은 옷 속은 땀이 흥건하고 헬멧 실드와 그 실드 안에 있는 안경에 진하게 김이 서린다. 20번쯤 킥을 차고 나면 ‘나도 가고 싶어서 가는 것이 아닌데 너까지 왜 그러냐’며 에이프 휀다를 붙잡고 엉엉 울어버리고 싶어진다. 우선 에이프 킥을 두어 번 차보고,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서 ‘누가 이기나 한번 보자’ 하는 맘으로 킥을 열댓 번 더 차볼 수도 있고, 그러고 싶지 않다면 가차 없이 자이로를 타고 나가면 되니까. 보통은 그냥 자이로를 타고 나간다. 평범한 겨울 아침이었다. 에이프의 킥스타터를 펼치고 발로 힘차게 차는데, 늘 짱짱하게 차있던 킥압이 차지 않았다. 이런 경우가 처음이라 당황했다. 

다음 날 센터에 주문한 윙크윙커도 교체해야 하고, 1년 넘게 미뤄온 세차도 해야 하는데. 무엇보다 60km/h 이상의 속도가 그리웠다. 늘 다니는 길은 신호 5개 정도를 직진으로 지나서 터널로 들어가는 코스인데, 에이프로는 신호에 걸리지 않고 쭉 직진할 수 있는 그 길을 자이로로 가면 첫 번째 신호가 초록불이 되자마자 정지선 맨 앞에서 출발해도 두어 번은 멈춰야 한다.
 
 
2월의 어느 날, 2개월간 방치한 에이프를 되살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나 하고 다시 킥 시동을 걸어보았지만 에이프는 ‘2달간이나 나를 방치해두고 갑자기 시동이 걸릴 거라고 생각해?’라고 말하는 듯 이전과 상태가 똑같았다. 마지막 남은 방법은 밀어 걸기. 문제는 내가 밀어 걸기를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는 것이지만 시행착오를 거치면 어떻게든 할 수 있지 않을까? 종종 킥 시동이 걸리지 않아 밀어 걸기를 시도하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밀어 걸기를 하는 법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기어를 2단에 두고, 클러치를 잡고, 내리막을 내려가다가 15-20km/h 정도로 속도가 붙으면 클러치를 재빠르게 떼고 시동이 걸리면 스로틀을 약간 당기면 된다.’ 친구의 설명을 되뇌며 내리막을 내려가는데 겁이 덜컥 나서 스로틀을 떼지 못했다. 그렇게 첫 시도는 허무하게 실패로 돌아가고 스스로에게 실망하며 다시 바이크를 끌어서 오르막에 오른 뒤, 바이크에 탔다. 

그런데 어디선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 사람은 한 발은 전동 킥보드에 올리고, 가만히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심호흡을 하고 클러치를 단단히 잡고 내려가는데, 나를 쳐다보던 그 사람(이하 주민 1)이 나를 향해 소리쳤다.

[주민 1] : 그거  배터리 없어요!
[노노] : (속마음: 어쩌라는 거지?) 네? 알아요.
[주민 1] : 그거 킥으로 시동 걸어야 돼요.
[노노] : (속마음: 킥으로 걸 수 있는데 밀어 걸기를 할까요?) 네 알아요! 제 바이크인데 그 정도는 알지 않을까요?
[주민 1] : 제가 그 모델 3번 분해해봤어요!
[노노] : (속마음: 그렇구나 그런데요?) 네 알겠습니다.

나의 마지막 대답을 듣고 주민 1은 첨언하지 않은 채 자리를 떴고, 나는 대화하느라 실패해버린 2번째 밀어 걸기와 그의 의미 없는 정보 전달에 짜증이 났다. 내가 도움을 주고 싶을 때, 도움을 주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도움이 필요한지 물어본다. 두 번째, 문제가 무엇인지 확인하고 할 수 있는 것을 한다. 이것이 어느 정도 인류 보편적인 과정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본인이 하고 싶은 말만 하고 가버리면 어쩌라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에이프가 배터리가 없는 바이크는 것도, 킥으로 시동을 걸어야 한다는 것도, 그 사람이 에이프를 3번 분해해 봤다는 것 전부 지금 나에게 도움이 되는 정보는 아니었다. 주민 1은 정말로 그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한 걸까?

만약 내가 점프 스타터로 시동을 걸려고 했다면 배터리 없다는 말이 정보가 도움이 될 테고, 셀 버튼을 찾고 있었다면 (그냥은 알아채기 힘드니까 “셀 버튼이 어디 있지? 정말이지 못 찾겠네”라고 크게 외쳐야겠지) 킥으로 시동을 걸어야 한다는 정보다 도움이 될 테고, 비행기에서 의사를 찾듯 아파트 단지를 돌아다니며 “여기 에이프 3번 분해해보신 분 계십니까?”라고 외쳤다면 “제가 에이프를 3번 분해해본 사람입니다!”라는 대답을 듣고 기뻐하며 분해할 에이프를 갖다 바치겠지만, 나는 그저 밀어 걸기를 시도하고 있었을 뿐이지 않는가. 

이 이후 나는 SOS를 청하기로 했다. 지난달 지역의 바이크 카톡 방 멤버들과 길에서 우연히 만나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 에이프 얘기를 했었는데, 시동이 정 걸리지 않으면 SOS를 치라는 말을 기억한 터였다. 카톡으로 혹시 와주실 분이 있는지 여쭙자 마침 멀지 않은 곳에 계시다며 세 분이 오셔서 돌아가며 몇 번 킥을 차 보시다가, ‘아, 초크가 열려있었네요’라는 한마디에 시시하게 해결되었다. 시동이 걸린 것을 자축할 겸 에이프로 세차 바리를 떠났다. 집 근처에도 셀프 세차장은 많지만 코에 바람도 넣을 겸 옆 도시까지 다녀왔다. 오랜만의 세차라 꼼꼼하게 때를 벗기고, 흠집이 있는 부분은 챙겨간 컴파운드로 반짝반짝 광까지 냈다. 

다음날, 깨끗해진 에이프를 타고 집을 나설 생각에 설렌 나는 창밖을 보고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한파주의보와 함께 눈이 펑펑 내렸던 것이다. 겨울이었다. 
by. 노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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