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수 시인의 문화 산책] 느낌이 있는 하루

M스토리 입력 2022.09.30 16:21 조회수 2,573 0 프린트
누구나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다. 그런데 그 스타일에는 두 가지가 있다. 마음에 들거나 들지 않거나.
멋진데! 하면 마음에 드는 것이고 별론데! 하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은 느낌이 있되 좋은 느낌이 아니라는 것. 
하지만 좋은 느낌이든 나쁜 느낌이든, 느낌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것이 아닐까? 살아있다는 것이기에. 

스페인의 투우사나 브라질 쌈바 축제의 화려한 의상, 미국 서부의 카우보이 복장에서는 다분히 열정적이고 역동적인 율동이 느껴진다. 옷이라고 하기에는 좀 허접해 보이는 아프리카 밀림의 토인들 몸가림용 나뭇잎, 풀잎에서는 ‘아, 저런 걸 몸에 걸치고도 사는구나!’ 하는 이색적이면서도 신비스러운 감마저 든다. 마치 시공을 초월한 옛 원시시대의 선조들을 만나는 것처럼.

그런데 왜 ‘복장’, ‘의복’이라하면 서민이 입는 것 같고 ‘드레스’니 ‘의상’, ‘의관’ 그러면 마치 귀족이나 양반 같은 신분이 높은 사람이 차려입는 것 같은 품위를 느끼게 하는 것일까? 하기야 역사적으로 보면 옷이나 색감이 그 사람의 신분계급을 나타내던 시절이 있었으니 그에 따른 언어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조선시대만 해도 그렇다. 아무나 도포를 입을 수 없었고 아무나 황색과 자주색 옷을 입을 수 없지 않았는가. 그런가하면 불과 수십 년 전만하더라도 여성들이 외출복을 장만하려면 경제적 여건과 사회적 활동 상황에 따라 양장점이나 의상실, 싸롱 등에서 맞춰 입었다. 물론 현재에도 경제적 신분 -가령 재벌과 서민 등- 에 따라 국경을 초월한 <명품>을 가격에 맞게 구입하여 입긴 하지만. 

하지만 똑같이 값비싼 명품의 옷을 입었더라도 어울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전혀 아닌 사람이 있다. 몸매에 의한 ‘옷걸이’ 차이 때문이기도 하겠으나 어떤 사람은 싸구려 작업복을 입었는데도 마치 예술가 같은 클래식한 멋이 느껴지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명품을 입었는데도 그저 남의 옷을 빌려 입은 듯 어색해 보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라도 옷에는 좋고 나쁨이 있을 수가 없다. 유행하는 똑같은 디자인의 옷이라 하더라도 촉감이든 색상이든 뭐가 달라도 다른 것이기에, 이 세상에 단 한 벌뿐인 유일한 것이다. 

하루는 아내가 옷장에서 유행이 지나고 몸에 맞지 않는다며 몇 보따리나 옷들을 골라냈다. 겨울 코트, 바바리, 스커트, 블라우스....... 한숨을 쉬어가며 아내는 과감하고 단호하게 정리하여 분리수거장에 내다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다 최근에 구입한 옷들로 빼곡히 재배치했다.

하지만 ‘풍요 속의 빈곤’이라던가! 아내나 딸은 외출할 때 마다 ‘입을 게 없다’고 푸념을 한다. 그런 푸념을 들을 때면 나도 모르게 내가 아내나 딸에게 외출복 한 벌 제대로 해주지 못했나, 하는 무능력감과 자괴감이 들곤 한다. 우리 집 여자들은 왜 그럴까? 그리고 나는 또 왜 그런 서글픈 자괴감을 갖게 되는 것일까?

내가 중·고등학교 다니던 시절에는 교복이나 활동복을 형에게 물려받아 입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나 같은 외아들들은 형이 있는 아이들이 몹시 부러웠다. 그러나 형이 있는 아이들은 또 매일 헌옷만 물려 입는다고 울분을 터뜨리곤 했으니 참으로 웃픈 추억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동물들은 옷 대신 털이나 깃을 갖고 산다. 일생 그거 한 벌로 산다. 그 얼마나 경제적이고 편리한 삶인가!

사람 가운데에도 그런 부류가 있다. ‘성자(聖者)’들이 그들이다. 예수, 석가, 쏘크라테스, 디오게네스, 간디....... 그 분들은 모두 단벌이거나 몸에 걸치는 정도로 아주 가볍게 입고 살았던 것 같다. 

그렇다면 혹, 그렇게 입어야만 성자가 될 수 있는 것인가?
출근길에 문뜩, 거울을 한 번 더 들여다본다. 
M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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