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나라의 운명을 바꿀 압도적 승리의 전투가 시작된다! <한산: 용의 출현>

M스토리 입력 2022.08.01 14:19 조회수 3,355 0 프린트
 

일본은 15세기 후반 서세동점(西勢東漸 : 서양 세력이 차차 동쪽으로 옮겨옴)과 더불어 유럽 상인들이 들어오면서 신흥 상업도시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만 해도 일본은 단일 국가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지역 제후들을 중심으로 한 봉건적인 지배 형태를 띠었기 때문에 지역별로 조직된 무력 집단에 가까웠다. 그러나 상업도시의 발달과 더불어 종래의 지배 형태를 청산하고 통일 근대국가로 탈바꿈하느라 봉건영주들은 치열한 내전 상태에 돌입하게 되었다. 그 봉건영주들 중에 ‘오다 노부나가’라는 인물이 있었고, 그 밑에 또 한사람의 장수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수십년간의 혼란기를 수습하고 1587년 마침내 일본 열도 전체를 통일하고 스스로 관백이 된 ‘도요토미 히데요시’로 임진왜란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무릇 8년에 걸쳐 일본을 통일한 야망이 가득찬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랜 국내 전쟁에서 얻은 제후들의 강력한 무력을 해외로 방출시켜 소극적으로는 신흥 세력을 억제해 자신의 안전을 꾀하고, 적극적으로는 자국의 무역 이익을 확대하고 조선의 영토를 빼앗아 전쟁에 참여한 제후들에게 이를 할양해주고자 했다. 그는 ‘명을 치기 위한 길을 빌리려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조선을 침략해 온 것이다.

그는 대마도주 소오 요시토시에게 명나라 정벌의 뜻을 전하고 조선을 향해 명나라를 치러가는 길을 내줄것을 요구하도록 시켰다. 당시 대마도는 일본 땅이긴 했으나 조선의 도움이 없으면 먹고살 수가 없었다. 그러니 소오는 전쟁을 피하고 싶었다. 소오의 장인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전쟁을 피할 방편으로 조선에 통신사 파견을 요청했다.

통신사 황윤길(서인)과 부사 김성일(동인)이 1590년 4월 29일을 시작으로 일본으로 파견돼 도요토미를 만나고 1591년 1월 28일에 돌아왔다. 정사 황윤길은 당시 본 왜의 현실 상황을 직시하여 “반드시 병화가 있을 것”이라 말했다. 이에 반해 왜에 대한 조선의 문화적 우월감에 빠져 있던 부사 김성일은 당위를 내세워 현실을 왜곡하여 “왜는 결코 전쟁을 일으키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저 요행만 바라던 조선 조정은 반신반의하면서도 백성들을 동요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명분을 내세워 김성일의 낙관적인 보고를 수용했다. 
 

1592년 4월 13일 일본은 역사상 처음으로 30여만의 대병력을 9개 부대로 편성하고는 대마도를 거쳐 부산 앞바다로 침략했다. 이로써 7년간에 걸친 더없이 무모하고, 참혹하며, 지루한 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선발 부대 병력 가운데 고니시가 이끄는 제1진 1만 8,700명의 군사가 가장 먼저 출격하여 침략 이틀 만에 벌써 경상의 땅과 해안은 왜적의 손에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두려우면 도망가기 마련이다.’ 경상좌수사 박홍 역시 끝없이 몰려오는 적선을 보자 두려움이 앞서 본영을 버리고 자신이 지휘하던 대소 군선 103척을 바다에 가라앉힌 뒤 도망쳤다. 경상우수사 원균은 경상우수영을 불태우고 1만여명의 수군을 해산시켰다. 전선 60여척과 대포를 바닷속에 버리고 군선 4척에 부하들과 나눠타고 달아났다. 

무엇보다 개탄스러운 일은 개전초 임금 선조의 한심하고 못난 행적이다. 선조 또한 난리를 예측하고 미리 대책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에 전쟁이 나자 두려움에 빠져 도주할 궁리만 했다. 4월 29일 신립 장군이 충주 전투에서 패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중신들의 권유를 뿌리치고 바로 다음날인 4월 30일 한양을 떠나 명나라를 향해 도망갔다. 

조선이 이처럼 허둥대고 있는 동안 왜적의 제1진 고니시는 가운데 길인 조령을 넘어, 제2진 가토는 동쪽 길인 죽령을 넘어, 제3진 구로다는 서쪽 길인 추풍령을 넘어 누가 먼저 수도를 점령하는지 경쟁이라도 하듯 한양으로 향했다. 이들은 아무 저항도 받지 않고 무인지경으로 진격한 끝에 동래를 무너뜨린지 겨우 20일 만인 5월 3일 마침내 도성인 한양마저 함락시키고 만다. 


그러나 이순신은 5월과 6월에 옥포, 당포에서 대소 일곱 번의 승첩을 거두었다. 이순신은 원균이 전쟁 초 전선을 자손해 적을 바다에서 막아내지 못한 잘못이 크면서도 반성은커녕 자신을 시기하고 사사로이 공을 차지하는 데만 혈안이 된 모습을 보고는 그를 경멸해 인정하지 않았고, 원균은 자신이 전쟁 초에 전선을 자손한 것을 잘못이라 생각지 않았는데 남은 배 3~4척으로 전라수군과 합류하다 보니 모든 공이 이순신에게로 돌아간다고 생각되자 이순신에 대한 시기와 질투로 그를 인정하지 않으려했다.

이순신 함대에 연전연패를 당한 왜적 지휘관들은 서해를 통한 군수품 보급과 수륙연합 작전이 수포로 돌아가자 도요토미로부터 거센 질책을 받고 전전긍긍했다. 그러다가 6월 14일 왜 수군의 최고 무장들인 와키사카, 구키, 가토 등이 작전회의를 열었다. 이들은 총력을 다해 조선 수군을 깨뜨리고 이순신을 죽이자는 결의를 다졌다. 그리고 마침내 115척에 이르는 대규모 연합 선단을 구성해 이순신이 있는 여수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지형을 살펴본 이순신은 두가지 이유를 들어 적은 한산도 넓은 바다로 유인해 섬멸시켜야 한다고 결정했다. 견내량은 지형이 좁고 암초가 많아 판옥선처럼 큰 배 수십척이 일시에 들어가다가는 서로 부딪힐 염려가 있는 데다, 그곳에서는 배를 쉽고 빨리 돌리기가 어려워 전술상으로도 불리하며, 그 인근에 숨을 수 있는 육지와 섬들이 산재해 있어 적들이 만약 형세가 불리해져 육지로 도망가 숨게 되어 육지의 백성들이 해를 입을 우려가 크고 또 적을 일망타진하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원균은 이순신의 의견과 달리 바로 견내량 쪽으로 나가서 싸우자고 주장했다. 

먼저 판옥선 5~6척에게 일부러 적을 덮쳐잡을 듯이 진격하도록 했다. 그러자 적 함대가 분격해 일제히 돛을 달고 따라 나왔다. 적들이 이순신의 유인 작전에 말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먼저 진격한 5~6척이 후퇴하자 이번에는 뒤에 있던 조선 함대도 모두 돌아서서 도망가는 척했다. 적선들은 더욱 의기양양해서 조선 수군을 추격했다. 한참 정신없이 추격해온 적선들은 어느새 한산도 넓은 바다 한가운데로 들어오게 되었다. 바로 이때, 연합함대는 서로 약속한 신호에 따라 어느 한 척도 지체하지 않고 번개치듯 배를 돌려 학이 날개를 벌리듯 삽시간에 적을 양쪽에서 포위했다. 바로 학익진(鶴翼陳)이었다. 

마치 거미줄에 걸린 나방을 희롱하듯이, 갈팡질팡하는 왜적 선단을 포위하여 한곳으로 모아놓은 조선 수군은 좌우 2척의 거북선을 앞세워 지자총통과 현자총통, 승자총통 등의 중화기를 적진 중심부로 무차별 퍼부으며 돌격해 들어갔다. 한산해전에서 사망한 왜적 수는 무려 9,000여 명에 이르렀고, 광교산에서 2000명의 왜군으로 조선군 5만명을 궤멸시킨 총대장 와키사카는 김해쪽 무인도로 달아나 미역만으로 연명하며 목숨을 부지했다.
 

한산대첩은 의기양양하던 왜적의 기세를 근본적으로 꺾어 전쟁의 승기를 조선쪽으로 돌려놓은 역사적인 해전이다. 또한 의주로 피난 간 선조에게 “우리 해군 10만명이 또 서해로 진군해오는 길이니 알 수 없소이다. 대왕의 수레가 이제 어디로 가시려는지!”라고 교만한 조롱을 보낸 적장 고니시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그의 발을 평양에 묶어두고 더이상 의주로 진격하지 못하게 한 계기도 되었다. 

한산대첩의 의의는 적의 우두머리 도요토미의 발을 묶어 왜적의 사기 확산을 막고, 땅에 떨어진 민중의 사기를 한순간에 드높인 점이다. 전란의 고통에 빠져 있던 조선 백성은 이제 이순신 이름 석 자에 위로받을 수 있었고,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실제로 이 같은 영향으로 조선 민중 일부가 의병으로 봉기해갔으니, 한산대첩이야말로 조선 백성들의 사기를 한순간에 높여준 획기적인 전투가 아닐 수 없다. 

백성을 버리고 도망간 선조는 누구의 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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