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날이 무더워지고 날벌레가 많아지면서 거미도 부쩍 늘어난 것 같다. 창고와 야외화장실을 지날 때마다 이마와 옷에 거미줄이 끈끈하게 달라붙어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보이는 족족 손으로 나뭇가지로 걷어내 보지만 헛수고다. 다음날이면 영락없이 거미는 또 여기저기 거미줄을 쳐놓고 나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태풍과 뜨거운 여름햇살에도 좀체 끊어지지 않는 끈끈하고 질긴 포승줄로 나를 붙잡아매고야 말겠다는 듯 집요하다.
도시와 시골이 다른 점이 있다면 거미가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있는 것 같다.
미화원들의 수고로 도시의 거리엔 거미줄이 거의 보이지 않지만 공원이나 후미진 골목에는 여전히 사시사철 거미줄이 점거하고 있다. 거미의 생명력과 지배력이랄까. 거미는 지구의 밝은 곳뿐 아니라 어두운 곳 어디에나 세금도 내지 않고 무단으로 상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나는 거미를 파리나 모기 같은 곤충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거미는 사람처럼 동물이라는 것이다. 절지동물 중 협각류, 그 중에서도 거미강에 속하는 동물을 통틀어 부르는 말이다. 전 세계에 3만종 우리나라에도 600종이나 있다는데, 아프리카나나 아메리카 밀림에는 독이빨을 갖고 있는 거미도 살고 있다 한다. 다행스럽게 우리나라엔 독거미 종류는 없고 모기 파리 같은 해충을 잡아먹는 거미가 대부분이라 ‘농약거미’란 애칭을 듣고 있지만, 나에겐 그저 혐오스런 벌레일 뿐이다. 한때 거미에게 혼이 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어린 시절 여름날 아침이었다. 동네 친구네 집에 놀러가던 길에 철조망 거미줄에 맺힌 아침이슬이 너무나 영롱하여 손가락으로 만져보려는 순간, 숨어있던 갈색 왕거미가 나타나 내 손가락을 꽉 깨물었던 것이다.
그 뒤로 나는 거미만 보면 도망을 치곤한다. 특히 시골 친척집에 다니러 가면 화장실(잿간)에서 변을 볼 때마다 거미들 때문에 기겁을 하곤 했다. 물론 나이가 들면서 신경이 둔감해져 순화되긴 했지만 그래도 트라우마에 의한 감정은 어쩔 수가 없는 것 같다.
내가 처음 만난 그 왕거미는 거미줄에 먹이가 걸리기를 기다리는 정주성(定住性) 거미였다. 거미줄을 만들지 않고 돌아다니며 사는 배회성(徘徊性) 거미도 있다는데 사람이 사는 양상도 어쩌면 거미들과 비슷하지 않나싶다.
가령 명절이면 TV에서 방영하는 ‘스파이더맨’의 피터 파커는 악당을 찾아다니는 배회성 거미사람이고 우리 드라마 ‘거미 여인의 사랑 법’에 나오는 거미 여인 인남(생물학 박사, 오유진 분)은 정주성 거미라 하겠다.
<사랑이란 감정은 호르몬(도파민)의 장난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그녀는 어느 날 우연히 찾아온 연쇄살인범 지운(이선균 분)을 거미처럼 다락방에 가두어놓고 사랑을 하게 된다. 하지만 지운은 “자기를 사랑하지 말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사랑하면 자기가 살해한 여자들(변심한 여자들)처럼 죽이겠다.”고 협박하지만 드라마 마지막 장면에서 오유진이 그래도 “사랑한다.”는 말을 하자 이선균이 소리 없이 우는 장면이 압권이다.
(요즘 거미를 개나 고양이처럼 반려동물로 기르는 사람들이 있는데, 혹 그들의 거미사랑도 호르몬의 장난 때문은 아닐까?)
사실 거미는 소리통이 없어서 소리를 내지 못한다. 하여 울지도 못한다. 거미의 소리는 스트리둘레이션(stridulation)방식이라고, 적에게 위협을 받았을 때 다리를 비벼서 경고음을 내는 정도이다. 하지만 일본의 하이쿠 시인 바쇼는 거미의 우는 소리를 듣는다. 가을바람의 음으로…
<거미여 무슨/음을 무어라 우나/가을바람>
우리나라엔 노래하는 거미가 있다. 호소력 있게 저음과 고음 3옥타브를 넘나들며 대중을 매혹시키는 가수 <거미>.
하지만 왕거미는 나에겐 여전히 혐오스런 미물일 뿐이다. 아니 어린 시절의 아픈 충격으로 하여 미워하고 증오한다.
그런데 왜 거미는 내 주변에 그렇게 많이 서식하고 있는 것일까?
혹시 나를 상대로 한 특정한 임무를 띠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그에 대해 일찍이 성철 스님이 한 말씀해주셨다.
“나를 칭찬하고 숭배하는 사람들은 모두 나의 수행을 방해하는 마구니며 도적이다. 중상과 모략 등 온갖 수단으로 나를 괴롭히고 헐뜯고 욕하고 괄시하는 사람보다 더 큰 은인이 없으니, 그 은혜를 갚으려 해도 다 갚기 어렵거늘 하물며 원한을 품는단 말인가?”라고…
하여 나는 성철스님의 교훈에 따라 거미에 대한 원한을 없애보려고 마음의 시를 몇 줄 써보았다. 늦은 밤 공원 벤치에 앉아 달을 바라보며...
<거미와 달>
듣자니, 거미란 놈이 거리의 나뭇가지에다/미니홈페이지를 개설했다는군요/손님을 기다리는 모양인데/하루 종일 푸른 하늘을 배경화면으로 깔고/구름과 시원한 비바람을 실시간으로 서비스해도/파리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는다네요//아무래도/수억 광년 떨어져 있는 별이나/흘러간 팝송 같은 개울 물소리라도/ 메뉴판에 더 얹어놔야 할까봅니다//목이 길어 목마른 밤//달덩이 하나 덜렁 거미줄에 걸리자/허기진 녀석이 졸다 말고 덥석/마른 이빨로 꽉, 깨물었네요 정신없이/엄마 젖 빨듯 달빛을 빨아대네요//저런!/하루하루 쭈그러드는 달이 안쓰럽네요
지난 주 보름날이 돌아가신 어머니의 기일이었다. 아내가 제사음식을 마련하느라 수고가 많았다. 제사를 모시고 나서 제사음식을 끼니 때 마다 조금씩 덜어먹는다. 하루하루 어머니를 닮은 달도 조금씩 기울어가고 있다.
시를 다시 읽어보고 혹여 내가 누군가를 물어뜯고 함부로 거칠게 말을 하는 비호감의 존재는 아닌지, 여름 달밤에 어머니를 생각하며 한 생각 꼬누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