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온이 30도를 오르내린다. 대지만큼 몸도 뜨거워지는 것 같다! 나른했던 봄이 물러가고 밀림 속 뱀이 내 몸 어딘가에서 꿈틀거리는 느낌이다. 여름이 시작되려나보다. 아니 여름은 이미 시작되었다. 붉은 장미가 담장 가득 핀 것을 보면 여름은 어느새 내 앞에 성큼 다가와 다정히 어깨를 짚는다.
누군가 생각나고 또 누군가를 만나게 되는 여름. 매년 돌아오는 여름이지만 매년 장미가 새롭게 꽃을 피우듯 나에게도 새로운 계절이란 느낌이 든다.
아내를 처음 만난 게 여름이어서 그런가!
아닌 게 아니라 우리는 첫 데이트를 장미축제가 열리는 용인 에버랜드에서 했다. 놀이동산과 장미축제장이 갈라지는 길 앞에서 아내를 기다리는데 공교롭게도 그곳에서 M도 만났다. M은 누나가 간호사로 근무하는 C시의 H병원 원장님 막내딸이다.(당시에 나는 의료분야 전문지기자 생활을 하였으므로 누나도 만날 겸 자주 병원에 드나들어 친숙한 관계였음.) 남편과 함께 놀이공원에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M은 나를 보자 눈을 크게 뜨고 무척 반가워했다.
“어머, 이게 누구야. 장미축제 취재 나온 거예요?”
순간 나는 멈칫했다. 조만간 M의 어머니가 나에게 지인의 딸을 소개시켜주기로 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상 참 좁네요… 그럼 재밌게 놀다가세요.”
나는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는 도망치듯 아내가 걷고 있는 장미의 정원 쪽으로 달려갔다.
M의 어머니(H병원 사모님)는 나를 볼 때마다 늘 그러셨다.
“미스터 권은 중매는 어렵겠다. 홀어머니에다 누나들도 많고, 키도 작고… 그러니 연애를 해야 할 거야.”
그러던 분이 하루는 내가 H병원에 누나를 만나러갔을 때 느닷없이 조만간 지인의 딸을 소개시켜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랬는데, 그만 그날 장미축제장에서 딸 M에게 데이트 현장을 딱 들켜버렸으니…
당신에게서 꽃내음이 나네요
잠자는 나를 깨우고 가네요
싱그런 잎사귀 돋아난 가시처럼
어쩌면 당신은 장미를 닮았네요…(후략)
친구K가 SNS로 가수 ‘사월과 오월’의 히트 곡 <장미>를 보내왔다. 노래를 보내면서 친구는 장미 같은 아내를 만났던 청춘시절이 생각난다 했다. 나 역시 노래를 들으며 쑥스럽고 감미로웠던 그 시절을 회상하고 있는데 아내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우리 딸이 출산을 앞두고 ‘당근’(중고 물품유통 몰)에서 수시로 아기 옷을 구입하더니 이번엔 장난감을 구입했다는 내용이었다.
중고를 구입한다고, 우리 딸이…? 순간 나는 아내의 말이 곧이들리지 않았다.
딸은 소녀시절부터 줄곧 ‘신상(신상품)’만 고집했던 기억이 나서였다. 아내도 나와 같은 느낌을 갖고 있었던지 딸이 일찍 자기 집을 장만한 친구 이야기를 듣고 자극을 받아 알뜰 모드로 변모했다는 설명을 들려주었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아내도 처녀시절엔 서울 명동에서 싸롱 의상만 맞춰 입었는데 집 장만한다고 더 이상 옷을 맞춰 입지 않았고 절약하고 또 절약했던 고난의 시절이 있지 않았던가! 그렇듯이 딸도 이제 아내처럼 고난을 스스로 감내하겠다는 것이 아닌가!
아내는 전화말미에 장난감 구입 장소가 딸네 아파트보다 우리아파트가 가까우니 주말에 ‘차를 몰고 가서 대신 찾아오라’는 명령 아닌 명령을 내리고 끊었다. 가슴이 짠했다. 딸에게 장난감을 사준 기억이 없었기에 이제 와서 비로소 빚진 아빠 역할을 하게 됐다는 기분이 들어서였다.
우리 딸은 장난감 욕심이 좀 있었다. 아주 오래 전, 그러니까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이었다. 문학서클 동기인 김시인네 집에 놀러갔을 때, 두 살이 더 많은 김시인네 딸과 우리 딸이 거실에다 등산용 텐트를 치고 같이 놀면서 장난감을 놓고 다투었던 적이 있었다.
그날의 상황을 언젠가 우리 딸은 이렇게 회상했다.
“착한 언니였어요. 아끼던 장난감인데 나에게 양보해줬던 기억이 나네요.”
그 착한 김시인네 딸은 귀엽고 조그만 바이올린도 우리 딸에게 물려주었다. 하여 내가 “고맙구나. 도레미… 음계도 좀 가르쳐주렴. 그래야 동요라도 연주를 할 수 있지 않겠니?” 했다. 그러자 김시인네 딸은 “도 하나만 연습하는데도 한 달이 걸려요.” 하고는 우리 딸에게 그냥 ‘장난감처럼 갖고 놀라’고 했다. 당시에는 그게 무슨 말인가 했는데 훗날 우리 딸은 단순히 음악애호가가 되었지만 김시인네 딸은 음악영재로 발탁돼 각종 국제콩쿠르를 휩쓸더니 미국의 명문 Y대학에도 유학하여 음대교수가 되었고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어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다.
저지난해,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그 김시인네 딸의 연주회에 우리 가족 모두 초대받아 다녀왔다. 그리고 나는 삼십여 년 간 보관해왔던 그 장난감(?)바이올린을 김시인에게 되돌려주었다. 낡은 추억의 바이올린을 받아들고 감회가 새로운 듯 기뻐하는 김시인을 바라보며 나도 그의 딸의 성공에 일조(?)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즐거웠다.
하지만 딸의 장난감은 내가 찾아다 주지 않아도 되었다. 금요일 오후에 내가 서울에 도착하기 전에 아들이 회사에서 퇴근하면서 찾아다 주었기 때문이었다. 아들이 고마웠다. 아빠의 수고를 덜어준 것도 그렇지만 오누이간에 서로 도우며 살아간다는 것은 여간 기꺼운 일이 아닐 수 없기에…
지인들이 연일 SNS로 각종 장미꽃 사진을 보내온다. 장미축제는 다 끝났지만 변함없는 그들의 다정한 마음처럼 향기로웠다.
올 여름은 뭐가 바빴는지 장미축제를 모르고 지나갔다. 여름이 가기 전에 아내와 가까운 공원에라도 가서 늦게 핀 장미가 있는지 살펴봐야겠다. 소원했던 부부 사이에 아련한 향기나마 적셔보고 그곳에서 또 나의 현재를 일깨워줄 누군가를 우연히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해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