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벚꽃이 지고 영산홍이 필 무렵, 또 한 차례 시리고 모진 꽃샘추위가 산천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리고 봄비가 하루 종일 내렸다. 겨울을 말끔히 씻어내기라도 하려는 듯, 줄기차게 내렸다. 한동안 가물어 나무와 풀들이 기다렸을 단비라 텃밭을 가꾸는 나 역시 몹시 반가웠지만 언제 또 한파가 몰아닥칠지 몰라 불안한 눈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사무실 뜰엔 꽃잎을 다 잃어버린 배나무와 벚나무가 축축한 가슴을 더운 바람으로 말리고 있었다. 기온이 27도나 올라가 여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봄 아닌 봄을 바라보며 대관령 아랫동네 친구 H에게 전화를 걸었다.
“텃밭에 뭐 좀 심었냐?”
“...”
대답이 없다. 잠시 후 한숨소리가 건너온다.
“이곳은 게을러야 농사를 짓는다. 스로우 스로우… 작년에 이사 온 이웃사람이 부지런히 모종을 냈다가 상추만 빼고 다 얼어 죽였단다.”
“허허 그랬군. 그런데 이 동네는 이미 다들 감자와 고구마를 심었어… 그래서 나도 뭐 좀 심어볼까 하고.”
그가 작년 봄에 지나는 길에 고구마 순을 몇 포기 나눠주어서 뒤늦게 텃밭 한 고랑을 더 늘려 고맙게 심었던 것을 상기하며 말을 건넸다.
그러나 그는 올해 다른 채소를 심을까 생각중이라고 한다.
“작년에 고구마가 잘 안 돼서… 아내가 양상추를 심자고 하는데, 너도 양상추 심어봐라.”
하고 다정하게 알려준다. 언제인가부터 그는 나의 영농지도자가 되어 있었다. 하여 나도 게을러야 농사를 짓는다는 그의 말을 되새겨보며 “그래야겠군.”하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참을성이 부족한 나는 바로 그날 점심시간에 차를 몰아 가까운 모종가게에 들러 오이, 참외, 케일, 고추, 가지, 파프리카, 도마도(방울도마도), 쑥갓, 치커리 모종을 한두 가지 씩 사갖고 돌아왔다. 그러나 ‘양상추’ 모종은 사지 못했다. 모종가게 아주머니 말씀이 ‘양상추는 없다’고했다. 내가 선호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선호하여 부지런히 다 사갔거나 아니면 H의 말처럼 아직 심을 때가 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어떻든 그날 퇴근 후에 텃밭에다 꽃밭 가꾸듯 채소모종을 심었다. 손바닥만 한 텃밭이라 30여분 만에 다 심었다. 물 조리개로 물을 뿌려주면서 다음 주엔 호박과 하늘마 그리고 아내가 요청한 ‘단호박’도 몇 포기 울타리 밑에다 심어볼 요량을 했다.
텃밭 가꾸기는 사실 모종 값과 씨 값 건지기가 바쁜 노릇이다. 그래도 아내가 농약을 치지 않은 청정 채소를 반기기에 즐겁게 짓는다. 아내는 내가 가꿔서 가져간 푸성귀로 일주일치 반찬을 만들어 한 짐 싸준다. 그러면 나는 그 한 짐(반찬가방)을 메고 출장지 아파트로 와서 아침 점심 저녁 삼시세끼 비빔밥을 해 먹는다. 즐겁고 고마운 하루가 아닐 수 없다.
오늘은 텃밭 주변 산비탈에서 두릅까지 따서 두릅비빔밥을 해 먹었다.
사기대접에 잡곡밥(쌀, 보리, 서리태콩, 귀리)을 한 공기 퍼 담고 아내가 싸준 반찬을 듬뿍 넣어 고추장으로 비비고 봄이라 쑥국을 곁들여 배불리 먹었다.
아삭한 감촉의 무채와 배추김치, 깍두기와 연근, 향긋한 파와 마늘 그리고 콩나물(내가 가꾼 것은 아니지만)에서는 궁핍했던 시절의 추억이 씹힌다. 한 입 한입 아내와 돌아가신 어머니의 손맛을 생각하면서 밥과 반찬의 맛과 향기와 저작(咀嚼)에 의한 감촉과 음향도 음미했다. 흥겹고 즐거운 오케스트라가 아닐 수 없다. 입장료 없이 저 혼자 연주하고 저 혼자 관객이 되어 감상하는 작은 음악회랄까.
언젠가 TV에서 무작위로 동시에 누른 피아노 건반 10개의 음계를 다 알아맞히던 어느 음악 신동(神童)처럼 나도 비빔밥을 퍼먹으며 내 몸과 정신 속으로 스며드는 열 가지 반찬의 맛과 향기를 음계처럼 다 맞춰보는 것이다.
사실 그동안 나는 단순히 그날의 기분에 따라 포만만을 고려한 식사를 해왔었다. 지난해 가을, 문화치유명상원 김이란원장의 ‘음식치유명상’ 강의를 듣기 전까지는 그랬다.
연잎 밥을 이용한 그날의 명상 강의에서 나는 비로소 음식의 오감을 체험할 수 있었다. 음식 차림을 살펴보고 최소한 30번 이상 저작하는 동안 음식의 맛과 감촉 그리고 향을 면밀히 느끼며 명상하는 여유 있는 식사. 남들도 이미 다 알고 있고 너무나 사소하여 생각조차하지 않는, 그러나 바쁜 일상에서는 매일 매일 실천하기 쉽지 않은 식사법이다.
누구나 자신만의 식사법이 있다. 음식전문가 B씨는 자신이 운영하는 식당엔 ‘TV를 설치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유는 TV를 시청하게 되면 음식의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
승가대 총장을 역임한 종범 스님이 유튜브에서 들려준 조적(調適)이란 말도 생각났다. 그 말은 수행하는 스님들의 소박한 식사법과 관련된 ‘조화롭고 적합하다’라는 의미의 ‘여법(如法)하다’라는 말과 함께 김형석 교수(105세)의 ‘장수비결’이 담긴 식단도 찾아보게 했다.
김교수는 아침에 우유 반잔에다 호박죽 반잔, 반숙 계란 하나에다 채소 샐러드 그리고 토스트나 찐 감자, 과일 한두 조각과 아메리카노 커피 반잔을 마신다. 점심과 저녁은 단백질 위주로 먹는데, 점심에 생선을 먹으면 저녁에는 고기를, 점심에 고기를 먹으면 저녁에 생선을 드신다고 한다.
누구나 김교수처럼 골고루 정갈하게 식탁을 꾸미기는 쉽지 않다. 다만 일상이 바쁘다보면 자칫 편식을 하거나 인스턴트 같은 부실한 식사로 건강을 해칠 우려가 있기에 자기 나름대로의 식단을 꾸며보자는 것이다.
나와 우리 가정의 식단은 조화롭고 적합하게 차려지고 있는가?
늦봄 아침에 비빔밥오케스트라를 감상하는 기분으로 창밖을 내다보며 문득 다가올 여름 건강식단을 점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