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흥선대원군 집권의 가장 큰 목표는 약화된 왕권을 재확립하고 실추된 국가 기강을 바로잡는 것이었다. 그는 이를 위해 과감한 내정 개혁을 추진했다. 첫째, 세도정치 타파와 인재 등용의 탕평책을 펼쳤다. 안동 김씨를 비롯한 세도 가문을 축출하고, 당파와 문벌을 가리지 않고 능력 있는 인재를 등용하여 정치적 기반을 다졌다. 이는 오랫동안 특정 가문에 의해 독점되던 권력을 분산시키고, 새로운 인재들에게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중앙집권적인 왕권 강화를 도모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특히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을 강화하고 비변사를 폐지하여 국정 운영의 효율성을 높이고 왕권 중심의 통치 체제를 재정비했다. 둘째, 삼정의 문란 시정을 통해 민생 안정에 힘썼다. 특히 백성들의 고통이 컸던 환곡 제도를 개선하고자 사창제를 실시하여 지방관의 수탈을 막고 농민의 부담을 경감시켰다. 또한 양반에게도 군포를 징수하는 호포제를 실시하여 특권층에게 면제되던 세금 부담을 공평하게 나누고, 재정 확보에도 기여했다. 이는 농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민심을 수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셋째, 서원 철폐를 단행하여 양반 유생들의 특권을 제한하고 국가 재정을 확충했다. 서원은 본래 교육과 제향의 기능을 담당했지만, 조선 후기에는 면세와 면역의 특권을 누리며 농민을 수탈하고 붕당의 근거지로 작용하여 폐단이 심했다. 흥선대원군은 "진실로 백성에게 해되는 것이 있으면 비록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고 하더라도 나는 용서하지 않겠다" 는 강력한 의지로 전국 서원 중 47개만 남기고 모두 철폐하여 유생들의 반발을 샀지만, 국가 재정 확충과 지방 행정의 효율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넷째, 경복궁 중건을 통해 왕실의 위엄을 회복하고자 했다. 임진왜란 이후 폐허로 남아있던 경복궁을 다시 지음으로써 왕실의 권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려 했다. 그러나 중건 비용 마련을 위해 원납전(강제 기부금)을 징수하고 고액 화폐인 당백전을 발행하여 물가 폭등을 야기했으며, 백성들을 부역에 강제로 동원하여 많은 원성을 사기도 했다.

흥선대원군의 정책은 분명 조선의 내부 모순을 해결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세도정치의 폐해를 바로잡고 민생 안정을 도모하려 노력한 점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만하다. 특히 그의 강력한 의지는 당시 무기력했던 조선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었다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쇄국 정책은 그의 가장 큰 한계로 지적된다. 당시 세계는 제국주의의 물결 속에서 강대국들이 약소국을 침략하고 식민지로 만들던 시기였다. 이러한 국제 정세 속에서 조선은 쇄국 정책을 고수함으로써 세계적인 흐름에서 뒤처지게 되었고, 결국 일본의 침략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국력을 기르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

흥선대원군의 집권은 조선 후기 사회의 다양한 문제점을 해결하려 했던 노력의 일환이었지만, 변화하는 국제 정세에 대한 이해 부족과 지나친 보수주의로 인해 조선의 자주적인 근대화를 가로막았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그의 정책은 한편으로는 조선 왕조의 명맥을 잠시나마 연장하는 데 기여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이 근대 문명을 수용하고 세계사의 흐름에 동참할 기회를 놓치게 하여 결국 망국의 길을 재촉하는 요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결론적으로 흥선대원군은 격랑의 시대를 헤쳐나가기 위해 강력한 의지로 내정 개혁과 쇄국 정책을 추진했지만, 그 영향은 명과 암이 뚜렷하게 교차한다. 그의 리더십은 조선 왕실의 권위를 일시적으로 회복하고 민생 안정을 꾀했으나,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한 대외 정책은 조선의 근대화를 지연시키고 국제사회에서 고립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여 이후 조선의 비극적인 운명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