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주의 내일의 풍속] 책 리뷰 - 길 위의 모터사이클

M스토리 입력 2025.05.19 21:04 조회수 1,804 0 프린트
 

오랫동안 연락이 뜸하던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우연히 책 한 권을 가지게 됐는데, 네 생각이 나더라고. 선물로 보내주고 싶은데 주소 알려줄래?’ 함께 보내온 사진은 <길 위의 모터사이클>이라는 제목의 그림책 표지였다. 수시로 모터사이클과 관련된 책을 찾아보는게 취미인 덕에, 도서관에서 한번 마주친 적 있는 책이었다. 빨간 석양을 배경으로, 긴 머리를 휘날리는 오토바이 여행자의 모습을 담은 표지가 흥미롭긴 했지만 어린이를 위한 그림책이라는 이유로 펼쳐보지도 않고 ‘저런 책도 있구나’하며 그냥 지나갔던 것이 희미하게 기억났다.

 

그리고 몇 일 뒤, 딱히 주문한것도 없는데 문앞에 놓인 택배를 보고 의아해하다가 보내는 사람에 적힌 친구의 이름을 확인하고는 갑자기 가슴이 뛰었다. 새로운 이야기에 대한 호기심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비가 많이 내린 날이어서 약간 젖은 책은 마치 표지속의 라이더가 우중 라이딩을 하고 있는것처럼 보였다.

그림책 <길 위의 모터사이클>은 실존 인물인 안느 프랑스에 대한 이야기이다. 1982년, 안느 프랑스는 프랑스 파리에서 이란의 이스파한까지 달리는 모터사이클 여행 ‘오리온 레이드’에 참가한 백 명이 넘는 참가자 중 유일한 여성이었다. 오리온 레이드를 완주한 후 다음해인 1983년도에는 4개월동안 프랑스 파리에서 출발해 캐나다를 가로질러 알래스카까지 갔다가 일본, 인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이란, 터키,독일 등을 거쳐 다시 집인 프랑스로 돌아온 뒤 오스트레일리아와 남아메리카를 횡단하는 여행을 이어갔다. 그렇게 안느 프랑스는 모터사이클로 세계 일주를 한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

 

책 뒤에 실린 이 책의 영감이 된 안느 프랑스에 대한 글과 그의 이야기에 최대한 충실하려고 했다는 작가의 말을 읽고나니 책 표지가 다시 보였다. 그러고보니 그냥 클래식 바이크가 아닌 업휀다잖아? 역시 세계 일주를 하려면 오프로드 세팅이 적절하겠지. 그런데 세계 일주라고 하기엔 바이크에 실린 짐이 단출하다. 책을 처음부터 펼치면 그마저도 고증이 잘 된 부분이란걸 알 수 있다.

가죽 자켓을 걸치고 라이딩 부츠를 신고 목에는 스카프를 두른채 안장에 오른 안나 프랑스의 짐가방에 들어있는 옷은 한벌의 원피스, 수영복 그리고 샌들뿐이었다. 옷은 한벌만 챙기더라도 각종 랜치와 팬치,드라이버와 클램프, 지렛대 등 필요한 공구는 빼놓지 않았다. 아영에 필요한 짐도 안나 프랑스 자신과 그의 바이크를 겨우 덮는 지붕만 있는 간이 텐트와 침낭, 냄비와 머그잔, 포크와 숟가락 뿐이다. 내가 20km도 떨어지지 않은 옆동네 야영장에 가서 1박 2일 모토 캠핑을 할 때 챙기는 짐보다도 숨 막히게 간소한 짐이다. 짐이 적어지면 모터사이클에도 부담이 적고, 모터사이클에 부담이 적으면 여행자에게 돌아올 리스크도 적으니 사실 멀리 떠나는 여행자가 취할 수 있는 가장 똑똑한 대비는 꼭 필요한 짐만 챙기는 것일지도 모른다.

 

모토 캠핑 일주일 전부터 무엇을 가져가야 할지 고민하며 옷방 한쪽에 짐을 가득 쌓아두고 전날까지 필요한지도 모르는 짐을 빼지 못해 가득한 짐가방을 싣다가 혹시 그것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며 이미 짐이 가득한 짐대 사이에 또 다른 짐을 끼워 넣는 내가 떠올라서 안나 프랑스가 더욱 존경스럽고 부럽기도 했다.

여행할 때 쓰는 것과 얻고 싶은 것이 명확한 사람은 무엇을 가져가야 할지 길게 고민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본 안나 프랑스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아무것도 없는 길 위를 달리고 사람들로 가득한 시장에서 대화를 나누고 마음에 드는 은목걸이를 하나 사 들고 다시 갈 곳을 지도에서 확인하는 사람. 은하수가 가득한 하늘 아래서 온천물에서 유유히 수영하는 사람. 바이크 옆으로 지나가는 기차에 탄 사람들에게 손을 흔드는 사람. 내가 되고 싶은 여행자의 모습을 가진 안나 프랑스의 여행기를 읽으며 지도를 펼쳐 가고 싶은 곳을 찾아보고 싶어졌다.

 

박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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