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벅터벅 사색(史索) 중] 세도정치(勢道政治) -2-

M스토리 입력 2025.04.30 15:20 조회수 113 0 프린트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정점을 이뤘던 헌종 시기 두 명의 왕이 나올 천하명당을 놓고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영화 '명당'.

새로 즉위한 헌종의 나이는 고작 여덟 살이었다. 대비인 순조 비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맡게 되었다. 왕실의 큰 어른으로서의 책임감 못지않게 친정에 대한 자부심 또한 큰 그녀였다. 김조순은 떠났지만, 그의 아들과 조카들이 이미 조정의 실세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정순왕후는 자기 주도로 수렴청정을 이끌었지만, 순원왕후는 친정 오라버니들의 자문에 의지했다. 그녀가 가장 먼저 행한 일은 효명세자의 추승이었다. 이에 왕비도 되어보지 못했던 세자빈 조씨가 일약 왕대비로 격상된다. 자연 풍양 조씨의 위상이 높아졌다. 더 나아가 대왕대비는 왕대비의 아비 조만영을 호위대장에 앉혔고, 그의 동생 조인영을 이조 판서에 임명했다. 풍양 조씨에 대한 배려였다. 또한 반남 박씨도 우대했다. 다른 가문과의 연대라는 김조순의 원칙을 추대한 것이다. 대왕대비는 헌종이 열다섯 살이 될 때까지 7년간 수렴청정을 하였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정사는 안동 김씨의 주도 아래 몇몇 가문이 장악한 비변사에서 이루어졌고 그녀는 남편 순조처럼 백성의 생활과 수령의 선발, 관리에 관심을 쏟았다. 삼정의 문란과 탐관오리의 수탈로 백성은 떠돌고 나라의 곳간은 비어가던 시절이었기에 그녀가 관심을 둔 분야는 사실 가장 중요한 나랏일이기도 했다. 부임지로 가기 위해 하직 인사를 하는 수령들을 불러 당부하고 이조, 병조에 수령 선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가 하면 수령 관리의 실태를 들어 질책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사를 틀어쥐지 않은 남편 순조의 노력이 소용없듯이 현실은 그녀의 바람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현실을 바라보는 자신의 인식에 중대한 맹점이 있음을 깨닫지 못했다. 

김조순은 세 아들을 두었다. 김원근은 순조 말년에 죽고 장자인 김유근이 안동 김씨 세도의 핵으로 떠올랐다. 순조 10년에 급제한 그는 순조 19년에 성균관 대사성, 홍문관 부제학에 이르렀다. 순조 27년에 평안 감사에 제수되었는데 부임하러 가다 큰 낭패를 보았다. 김유근은 이때 서제부와 첩을 동행시켰다. 그런데 덕천군에 아전이었던 자가 객사로 찾아와 면담을 청했고, 문지기가 거절하자 웃통을 벗고는 뛰어들어 닥치는 대로 칼을 휘둘렀다. 이 일로 서제부와 주모, 여종 2명이 죽었다. 최강 실력자 김조순의 장남이 당한 어처구니없는 봉변이었다. 조경진이라는 이가 나서서 첩을 부임지로 데리고 간 일을 탄핵하자, 대리청정 중이던 세자는 격노해 오히려 그를 절도에 위리안치시킴으로써 김유근을 위로했다. 체면은 좀 상했지만 정치적으로 큰 흠은 되지 않았다. 헌종 즉위 후 그의 입지는 더욱 탄탄해졌다. 대왕대비가 모든 일을 상의하는 상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지막 2년여는 중풍으로 말을 잃어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가 쓰러진 이후 대비의 자문을 맡은 이는 김홍근, 헌종 7년에 좌의정에 올라 명실상부한 실력자가 되는가 싶더니 이듬해 죽고 만다. 이들을 이어 안동 김씨의 중심으로 떠오른 이는 김유근의 동생 김좌근과 김홍근의 동생 김흥근이었다. 그는 순조 25년 김조순의 회갑 때 6품직에 제수되지만 이후 별다른 벼슬 생활은 하지 않았다. 헌종 4년이 되어서야 마흔둘의 나이로 급제하고 빛의 속도로 출셋길을 달렸다. 부교리, 규장각 직각, 이조 참의, 이조 참판, 공조 판서 등을 거쳐 채 4년이 못 되어 이조 판서에 오른 것이다. 김유근, 김좌근, 김홍근, 김흥근 외에도 직계 가족들이 헌종 연간에 삼사의 장이나 6조 판서의 자리에 오른다. 바야흐로 안동 김씨의 천하다. 대왕대비와 안동 김씨는 김조근의 딸을 헌종의 베필로 삼는다. 그렇게 2대에 걸쳐 안동 김씨는 왕비를 연속 배출했다. 김조순은 막후에서 조종하는 것으로 만족했지만, 그의 아들들인 김유근과 김좌근은 전면에 나서서 권력을 장악했다. 그런데 왕비를 배출했다 해도 수렴 때만큼 영향력이 크기란 쉽지 않다. 
 
영화 '명당' 중 한 장면으로 왕후의 뱃속에 있는 세자를 위해 김좌근을 찾아가 무릎을 꿇은 헌종.

헌종은 두 왕후와 후궁으로 둔 경빈에게서 후사를 얻지 못했다. 헌종은 자식은 물론 증조부인 정조의 피를 이은 종친 하나 없는 형편이었다. 헌종이 승하하자 대왕대비 순원왕후가 대신들을 만났다. 이어 헌종의 뒤를 이을 후계자를 선포했다. 이광의 3남 이원범이었다. 사도세자의 서자 셋 중 은신군은 영조 말 제주에 유배되었다가 죽고 은전군은 정조 1년에 사사되었다. 은언군의 경우는 그의 아들 상계군을 홍국영이 누이 원빈의 양자로 삼으려 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이후 상계군을 내세운 역모사건이 이어지면서 이후 정순왕후를 필두로 신하들의 격렬한 처벌 요구가 있었지만 정조는 끝내 지켜냈다. 그러나 순조시절, 부인과 며느리가 천주교 신도임이 드러나고, 배소에서 탈출하려다 발각되면서 결국 사사되었다. 그에게는 군호를 받은 아들이 둘 있었는데, 장자인 상계군은 정조 10년에 의문의 죽음을 맞았고, 풍계군은 은전군의 양자로 입적되었다가 후사 없이 죽었다. 이광은 군호가 없었던 것으로 보아 서자였던 보양, 아비가 사사될 때 살아남아 순조의 적극적인 보호와 배려 아래 결혼도 했다. 그는 세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인 원경은 혼종 10년 민진용의 역모사건 때 이름이 거론되어 죽고, 둘째인 경응은 생존해 있었지만 세 살 아래인 막내 원범이 후사로 정해졌다. 갑자기 대궐에서 호위대가 몰려오자 열아홉 살 총각 원범이 아연실색했다. 그렇게 꿈조차 꾸어본 일이 없을 인생 역전이 시작된 것이다. 

헌종 말년 적잖은 위기감에 시달려야 했던 안동 김씨 일문에게 헌종의 때 이른 죽음과 순원왕후의 2차 수렴청정은 행복한 정국의 연속이었다. 철종 비는 결국 안동 김씨인 김문근의 딸로 다시 결정되었다. 그렇게 순조, 헌종, 철종 연속해서 세 임금의 중전이 한 가문에서 나왔다. 김좌근과 김홍근 외에도 철종의 장인이 된 김문근과 그의 아우 김수근 그들의 아들들인 김병기, 김병국, 김병학 등이 권력을 장악했다. 출셋길은 물론이요, 가문의 번창 여부가 안동 김씨 실세들과의 관계에 따라 결정되었다. 때문에 그들의 집 앞은 눈도장이라도 한번 찍어보려는 이들과 벼슬 청탁을 하려는 이들로 가득했다. 매관매직은 당연한 현상으로 자리잡았다. 

특정인들의 욕심으로 나라는 망국의 길로 들어섰다. 지금의 정국과 무엇이 다른가.            
황춘식
M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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